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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역사이야기

세종대왕 업적 말고 리더십, 공법·노비·장영실·훈민정음·최만리·가족·말년

by 역사좋아 2026. 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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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실록 기사 중심 정리

세종대왕 업적보다 공법과 장영실, 훈민정음 반대 과정에서 사람을 쓴 리더십

훈민정음, 측우기, 자격루, 4군 6진, 농사직설. 초등학교 때부터 외운 목록인데 어른이 된 뒤에도 세종에 대해 아는 것은 여기서 크게 늘지 않았습니다.

 

얼마 전 세종실록 기사를 몇 개 들춰보다가 제가 갖고 있던 이미지와 조금 다른 사람을 보게 됐어요. 온화한 성군이라기보다 목표를 정하고 사람을 골라 쓰며, 필요하면 반대를 안고도 끝까지 밀어붙이는 관리자에 가까워 보였습니다.

 

업적만 보면 결과물이 남지만 그 과정에 있던 사람들은 쉽게 사라집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무엇을 만들었는지가 아니라 세종이 사람의 의견을 어떻게 들었고, 누구를 밀어붙였으며, 그 과정의 비용을 누가 치렀는지를 따라가 봤어요.

세종대왕 업적과 리더십

세종을 결과물로만 보면 이야기는 깔끔합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따라가면 훨씬 복잡한 리더가 나타나요.

그는 백성에게 직접 의견을 물었고 반대하는 신하의 말도 들었습니다. 동시에 판단이 끝나면 다수의 의견과 달라도 설계를 고쳤고, 오랫동안 쓴 사람도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내보냈습니다.

결과물로 보는 세종
· 훈민정음
· 측우기
· 자격루
· 4군 6진
· 농사직설
과정으로 보는 세종
· 넓게 의견을 듣기
· 오래 검토하고 수정하기
· 전문성을 기준으로 판단하기
· 결정 뒤에는 밀어붙이기
· 필요하면 사람도 교체하기

이 모습을 보면서 좋은 리더와 함께 일하기 편한 사람이 반드시 같은 개념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과를 잘 만드는 능력과 사람을 따뜻하게 대하는 태도는 서로 겹칠 수도 있지만, 언제나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세종대왕 공법

왕이 세금 제도를 바꾸겠다고 마음먹었으면 그대로 명령하면 될 것 같지만 세종은 먼저 전국에 물었습니다. 그런데 찬성이 더 많이 나왔다고 곧바로 시행한 것도 아니었어요.

17만 명에게 물은 공법

1430년 3월 5일부터 8월 10일까지 조정은 공법에 대한 찬반을 조사했습니다. 당시 세금은 관리가 논밭의 작황을 직접 살펴 등급을 매기는 손실답험 방식이었고, 세종은 사람의 재량이 개입하는 문제를 줄이려 했습니다.

 

관리들이 고을을 돌면서 한 사람씩 찬반을 묻고 이름과 답을 기록해 올렸습니다. 전·현직 관리뿐 아니라 세민으로 표현된 가난하고 비천한 백성까지 조사 대상에 포함됐어요.

172,806명
참여 인원
98,657명
찬성
74,149명
반대
14년
최종 확정까지

찬성은 98,657명, 반대는 74,149명으로 57.1 대 42.9였습니다. 당시 호적에 잡힌 인구가 약 69만 명이었다는 수치와 놓고 보면 조사 규모부터 상당합니다.

찬성이 이겼는데 14년을 기다린 이유

총계만 보면 찬성이 이겼지만 지역별 결과는 크게 달랐습니다. 경상도와 전라도는 찬성이 강했고 평안도·함길도·강원도는 반대가 강했어요.

 

곡창지대와 척박한 지역에서 같은 제도를 바라보는 이해관계가 달랐던 것입니다. 세종은 여론조사 결과를 그대로 결정문으로 쓰지 않고 왜 반대하는지를 다시 들여다봤습니다.

 

그 뒤 토지의 비옥도를 여섯 등급으로 구분하는 전분6등법과 작황을 아홉 등급으로 나누는 연분9등법이 마련됐습니다. 시범 운영과 수정을 거쳐 공법이 최종 확정된 때는 1444년 윤7월이었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세종이 의견을 듣는 방식이 가장 잘 보인다고 느꼈습니다. 많이 물어보는 것과 다수결에 따라 움직이는 것을 같은 일로 보지 않았어요.

세종대왕 노비와 장영실

사람을 대하는 세종의 모습을 한 방향으로만 정리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관노비의 출산을 보호하는 명령과 장영실의 마지막 기록을 나란히 놓으면 온도 차이가 상당해요.

노비 출산휴가 130일

1426년 세종은 관에 소속된 여자 노비가 아이를 낳으면 산후 100일 동안 쉬게 하라고 명했습니다. 당시에는 출산 뒤 이레 정도 지나 다시 일을 시키던 관행이 있었습니다.

 

1430년에는 출산 전 한 달을 더했고, 1434년에는 산모의 남편에게도 30일 휴가를 주도록 했습니다. 산모의 건강과 아이의 돌봄을 함께 본 조치였어요.

 

다만 이것을 현대적인 복지정책과 같은 감각으로만 읽기도 어렵습니다. 노비가 국가의 재산으로 취급되던 사회였기 때문에 사람을 보호하는 판단과 국가 재산을 관리하는 계산이 같은 방향을 가리켰다고 볼 여지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실행의 의미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계산이 있었더라도 실제 제도로 만들었느냐는 또 다른 문제니까요.

장영실, 20년 뒤 남은 마지막 기록

장영실은 동래현 관노 출신에서 종3품 대호군까지 올라간 인물입니다. 자격루와 앙부일구, 혼천의 등 정밀한 기구 제작에 참여하며 20년 넘게 활동했습니다.

 

1442년 세종이 탈 가마가 완성 직후 부서졌고 제작을 감독했던 장영실에게 곤장 100대가 내려졌습니다. 세종은 여기서 20대를 감해 80대로 낮췄지만 파직 자체는 막지 않았어요.

 

그 뒤 장영실에 대한 기록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고 언제 죽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결과만 놓고 보면 오랜 시간 최고 수준의 기구를 만들던 기술자가 가마 사고 뒤 기록에서 사라진 것입니다.

여기서 구분해서 볼 부분

관노 출신 장영실의 높은 지위에 대한 반발이 조정에 쌓여 있었고 가마 사고가 계기가 됐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다만 초안 자료만으로 그 해석을 사실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확실하게 남은 것은 가마 사고와 처벌, 파직 이후 기록이 끊겼다는 사실입니다.

이 장면 하나로 조선 기술의 전승 문제 전체를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뛰어난 기술자조차 한 번의 사고 뒤 얼마나 취약한 위치에 놓일 수 있었는지는 생각하게 합니다.

세종대왕 훈민정음과 최만리

세종이 의견을 들었다고 해서 반대 의견에 쉽게 흔들린 것은 아닙니다. 훈민정음을 둘러싼 최만리 등의 상소를 보면 오히려 결정 뒤의 세종이 얼마나 단단했는지가 보입니다.

최만리가 훈민정음을 반대한 이유

1444년 집현전 학사 최만리를 비롯한 일곱 명이 새 문자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중국과 다른 문자를 쓰는 문제, 기존 이두로도 충분하다는 주장, 제작 과정이 급했다는 지적 등이 담겼습니다.

 

세자가 새 문자 작업에 시간을 쓰는 것에 대한 반대와 형벌 기록을 백성이 읽게 될 때 생길 문제도 제기했습니다. 지금 눈으로 보면 답답해 보이는 주장도 있지만 당시 사대부의 세계관 안에서는 나름의 논리를 갖고 있었습니다.

반대는 두고 결정은 밀어붙인 세종

세종은 운서와 사성·칠음, 자모에 대한 지식을 물으며 반박했습니다. 자신이 이 문제의 전문성을 갖고 있다는 태도로 맞선 셈이에요.

상소한 학사들은 하루 동안 옥에 갇혔다가 다음 날 풀려났고 최만리도 이 일만으로 관직에서 완전히 밀려나지는 않았습니다. 반대하는 사람 자체를 없애기보다 반대를 남겨둔 채 정책을 진행한 모습입니다.

공법과 훈민정음에서 반복되는 방식

공법에서는 17만 명이 넘는 의견을 모았고, 훈민정음에서는 집현전 학사들의 강한 반대도 들었습니다. 두 경우 모두 의견을 듣는 과정 자체를 없애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최종 결정까지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지는 않았습니다. 세종에게 의견 수렴과 결정권은 서로 다른 단계였다고 보는 편이 자연스럽습니다.

조직에서도 의견을 충분히 듣는 것과 가장 많은 표를 받은 선택을 실행하는 것은 다른 문제일 수 있습니다. 세종의 사례에서는 왜 의견을 물었고 그것을 설계에 어떻게 반영했는지가 더 눈에 들어옵니다.

세종대왕 가족과 말년

백성과 신하의 의견을 듣던 왕을 왕실 안으로 데려오면 분위기가 다시 달라집니다. 가족 문제에서는 훨씬 직접적으로 개입했고 말년에는 자기 몸이 무너지는 동안에도 뜻을 쉽게 굽히지 않았습니다.

며느리들에게는 달랐던 판단

세자 시절 문종의 첫 아내 휘빈 김씨는 1429년 폐출됐습니다. 남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세자의 신발을 태운 재를 술에 타는 등 민간의 술법을 사용했다는 이유였습니다.

 

두 번째 순빈 봉씨도 1436년 폐출됐고 음주와 궁녀 구타, 거짓 임신 소동, 궁녀 소쌍과의 관계가 기록에 남았습니다. 세자빈이 두 번이나 바뀌는 일인 만큼 폐출을 정당화할 명분도 필요했을 것으로 읽힙니다.

 

임영대군의 아내 남씨와 영응대군의 아내 송씨 역시 병을 이유로 강제 이혼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남씨는 이후 70대까지 살았고 송씨는 세종이 죽은 뒤 남편과 다시 합쳐 딸 둘을 낳았다고 전합니다.

 

이 기록만으로 당시 판단의 속사정 전체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전국의 의견을 장기간 듣던 세종이 왕실 가족 문제에서는 훨씬 강한 결정권자로 움직였다는 대비는 남습니다.

병든 몸과 말년의 불당

세종의 말년 기록에는 병이 계속 등장합니다. 1438년에는 소갈증과 부종이 낫지 않는다는 기록이 나오고, 이후에도 임질로 적힌 증상과 통증이 반복됩니다.

 

1439년 기사에는 두통과 이질, 다리 부종, 수전증, 풍질 등이 함께 적혀 있습니다. 소갈증을 지금의 당뇨와 연결하고 여러 증상을 합병증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시력도 나빠져 온천 요양을 다녔고 1442년부터는 세자에게 정무를 넘기기 시작했습니다. 문종이 오랜 세자 생활의 후반부에 대리청정을 맡게 된 배경이기도 합니다.

 

그런 상태에서도 세종은 1448년 궁궐 안에 불당을 세우는 문제로 집현전 학사들과 다시 부딪쳤습니다. 학사들이 집단으로 사직서를 던지며 반발했지만 세종은 물러서지 않았고 불당은 지어졌습니다.

 

평생 유교 국가의 제도를 만들어온 왕이 말년에 불교를 붙든 모습을 하나의 이유로 깔끔하게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저는 오히려 이렇게 서로 맞지 않아 보이는 선택을 억지로 정리하지 않는 편이 한 사람을 보는 데 더 가깝다고 느꼈어요.

 

좋은 결과를 남긴 사람에게도 그 결과를 만드는 과정이 어땠는지는 따로 물어볼 수 있습니다.

훈민정음과 자격루라는 결과를 먼저 알고 역사를 보니 과정까지 반듯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웠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17만 명의 답변도 있었고, 반대 상소를 올린 학사도 있었으며, 출산휴가를 받은 이름 모를 관비와 기록에서 사라진 장영실도 있었습니다.

 

세종을 덜 존경하게 됐다기보다 너무 반듯하게 만들어놓았던 초상에서 한 사람을 다시 꺼낸 느낌에 가깝습니다. 존경할 만한 결정과 불편한 결정이 같은 사람 안에 있었다는 사실을 그대로 두는 편이 오히려 더 현실적으로 보였어요.

 

업적만 보면 세종은 위인으로 남지만 사람과 과정을 함께 놓으면 그제야 한 명의 왕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다음에는 정반대의 평가를 받는 왕을 놓고, 그 평가를 기록한 사람이 누구였는지부터 살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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