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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역사이야기

윤관 별무반 창설과 3군·17만 동원, 동북 9성 축성·이주·유지·반환·위치 평가

by 역사좋아 2026. 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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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04~1109년 기록 정리 · 고려사 기록 참조  |  ⏱ 약 9분

학교에서 배운 윤관은 별무반을 이끌고 여진을 정벌해 동북 9성을 쌓은 장군으로 남아 있어요. 하지만 나라 전체가 오랫동안 준비해 얻은 성을 불과 1년 7개월 만에 돌려준 과정은 한 줄로 지나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투는 이겼고 성도 실제로 세웠는데 왜 고려는 물러났을까요. 제 눈에는 전장의 승패보다 점령 이후 계속 쌓인 주둔·보급·이주 비용이 먼저 들어옵니다.

별무반 창설부터 9성 반환까지를 하나의 장부처럼 펼치면 승리와 실패가 동시에 기록된 이유가 보입니다. 여기에 아직 정설이 없는 9성 위치 문제까지 차례로 살펴볼게요.

윤관 별무반 창설

별무반의 출발점은 승리가 아니라 1104년에 겪은 두 번의 패배였어요. 그해 2월 임간은 정주성 밖으로 나가 싸우다가 크게 졌고, 뒤이어 파견된 윤관도 화친을 맺고 물러났습니다.

윤관, 17만 동원 뒤 동북 9성을 반환한 손익 계산

당시 고려가 마주한 여진은 흩어진 국경 부락만을 뜻하지 않았어요. 완옌부 아래로 세력이 모이기 시작했고, 이 흐름은 1115년 금나라 건국으로 이어집니다.

윤관은 패배 원인을 병력의 수보다 병종의 차이에서 찾았어요. 여진은 말을 타고 싸우는데 고려군은 보병 중심이어서 평지 전투의 출발 조건부터 달랐다는 진단이었습니다.

진단은 전투 상황에 잘 맞았지만 처방에는 큰 비용이 따라붙었어요. 기병을 늘리려면 말뿐 아니라 사료와 관리 인력, 오랜 훈련까지 함께 마련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숙종은 윤관의 건의를 받아 1104년 12월 별무반을 만들었어요. 문무 관리와 상인, 노비, 승려까지 편성 대상이 되면서 전쟁 준비는 정규군 보강을 넘어 사회 곳곳의 자원을 끌어오는 작업이 됐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별무반을 단순한 신식 부대로만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해요. 전투 방식의 약점을 고치려는 선택이면서 국가가 감당해야 할 지출 범위를 크게 넓힌 선택이기도 했으니까요.

별무반 3군과 17만 동원

별무반이라는 이름 하나만 보면 단일 부대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역할이 다른 세 군으로 나뉘었어요. 신기군·신보군·항마군의 구성을 보면 고려가 무엇을 보완하고 어디까지 사람을 동원했는지가 드러납니다.

세 군의 역할

부대 구성 인력 병종과 편성 의도
신기군 말을 소유한 관리·양반층 여진 기병에 맞설 기병 전력
신보군 말이 없는 일반 장정 성 공략과 수비를 맡을 보병
항마군 승려 축성과 전투에 투입할 추가 보병

신기군은 말을 가진 사람을 먼저 묶어 여진 기병에 대응하려는 별무반의 목적을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줘요. 말이 없는 장정은 신보군으로 편성됐고, 고려사에는 20세 이상 남자 가운데 과거 응시자가 아닌 사람을 대상으로 삼았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항마군에 승려까지 포함한 선택은 동원 범위가 정규 군제 밖으로 넓어졌다는 표시예요. 사찰이 보유한 인력까지 군사 자원으로 묶었다는 점에서 별무반의 규모와 부담을 함께 읽을 수 있습니다.

17만이 보여주는 투입 규모

숙종은 출정을 보지 못하고 1105년에 세상을 떠났고, 예종이 계획을 이어받았어요. 1107년 12월 윤관이 원수, 오연총이 부원수가 되어 출정했으며 고려사는 동원 병력을 17만으로 적었습니다.

17만을 읽는 방법

17만을 모두 전투 병력으로 단정하기는 어려워요. 전근대 동원 기록에는 수송·축성 인력이 함께 집계될 수 있으므로 정확한 실병력보다 국가가 최대 규모의 자원을 투입했다는 의미에 무게를 두는 편이 안전합니다.

작전은 빠르게 진행됐고 윤관의 군대는 동북면으로 들어가 여진 부락을 점령했어요. 준비한 기병이 의도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점에서 전투 단계는 성공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만 많은 인원을 한 번 모아 전투에서 이기는 능력과 점령지를 오랫동안 운영하는 능력은 서로 달라요. 별무반의 성과를 평가할 때 출정 장면보다 그 뒤에 남은 고정 지출을 함께 봐야 하는 이유입니다.

동북 9성 축성과 이주

땅을 점령했다고 국경이 저절로 유지되는 것은 아니에요. 고려는 확보한 지역에 성을 쌓고 남쪽 백성을 옮기면서 전투 다음 단계의 지출을 떠안았습니다.

아홉 성의 건설

기록에는 함주·영주·웅주·복주·길주·공험진 같은 성 이름이 등장해요. 다만 아홉이라는 수는 같아도 개별 성의 명칭은 고려사의 판본과 대목에 따라 조금씩 달라집니다.

성벽은 방어 거점을 제공하지만 그 자체로 세금이나 병력을 만들어내지는 못해요. 사람이 살지 않는 성은 수리와 경비에 자원을 계속 써야 하는 시설로 남습니다.

남계 백성의 이주

고려는 새 영토에 생활 기반을 만들기 위해 남계의 백성을 대규모로 옮겼어요. 고려사에는 6만 9천여 호라는 수치가 전해지지만, 이 역시 실제 가구 수를 확정하기보다 사업 규모를 보여주는 기록으로 조심스럽게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주민은 정착 직후부터 수확과 세금을 내는 존재가 아니었어요. 집과 마을을 세우고 농경지를 마련하는 동안 식량을 보내야 했으며, 성벽 밖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을 보호할 병력도 필요했습니다.

여기서 성의 숫자만 세면 고려가 얻은 것이 크게 보이지만, 성마다 따라붙는 사람과 물자의 흐름까지 적으면 장부의 모습이 달라져요. 저는 이주를 영토 확보의 완성이라기보다 가장 비용이 많이 드는 운영의 시작으로 보는 편이 사건을 이해하기에 더 알맞다고 봅니다.

동북 9성 유지와 반환

여진이 강해서 9성을 포기했다는 설명만으로는 고려가 전투에서 이기고도 물러난 과정을 충분히 설명하기 어려워요. 유지비를 주둔군·보급선·이주민 방어로 나누면 반환 결정의 현실적인 배경이 보입니다.

계속 쌓인 세 가지 비용

9성 유지 장부
⬜ 주둔군 — 서로 떨어진 성마다 병력을 두고 식량과 장비를 공급하는 비용
⬜ 보급선 — 개경에서 먼 동북면까지 물자를 보내고 운송로를 보호하는 비용
⬜ 이주민 방어 — 성벽 밖 농경지와 새 정착지를 넓게 지켜야 하는 부담

17만 동원은 출정 시점에 집중된 지출이지만 주둔과 보급은 해마다 반복됐어요. 산이 많은 동북면의 긴 보급로에는 수송 인력뿐 아니라 길을 보호할 병력까지 붙어야 했습니다.

이주민은 성벽 밖 농경지에서도 생활해야 했으므로 방어 범위가 더 넓어졌어요. 방어하는 쪽은 넓은 지역을 지켜야 했지만 공격하는 쪽은 약한 지점을 골라 흔들 수 있었습니다.

저도 예전에는 이 사건을 공부하면서 별무반 창설과 9성 축성이라는 결과만 적고, 반환은 마지막 줄에 짧게 덧붙인 적이 있어요. 그런데 주둔·보급·이주민 방어의 순서를 따로 적어보니 전투의 승리보다 그다음 시간을 버티는 일이 훨씬 복잡하게 다가왔습니다.

그 뒤로는 9성 반환을 단순한 무능이나 변심으로만 읽지 않게 됐어요. 이미 쓴 비용이 아깝더라도 앞으로 반복될 지출과 피해를 감당할 수 있는지는 별도로 판단해야 한다는 점이 더 눈에 들어왔습니다.

1109년 반환 회의

여진은 9성을 돌려주면 다시 국경을 침범하지 않고 조공하겠다는 뜻을 전했어요. 예종이 연 재추 회의에서는 계속되는 병력 손실과 남쪽 백성에게 내려간 수송 부담을 이유로 다수가 반환에 찬성했습니다.

윤관과 오연총은 이미 투입한 비용을 생각해 물러날 수 없다는 쪽에 섰어요. 그러나 조정은 1109년 7월 반환을 결정했고, 1107년 12월 출정부터 계산하면 점유 기간은 약 1년 7개월이었습니다.

항목 투입 남은 결과
준비와 동원 1104년 12월 별무반 창설, 고려사 기록 17만 대규모 기병·보병 운용 경험
축성과 이주 9성 건설, 남계 민호 대규모 이주 1109년 성과 이주민 철수
점유와 반환 약 1년 7개월간 주둔·보급·방어 새로 확보한 영토 0, 여진의 불가침 약속

반환 뒤 윤관과 오연총은 관직을 잃었어요. 윤관은 이듬해 관직을 되돌려 받았고 1111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문경이라는 시호를 받아 사후에 명예를 회복했습니다.

전투 성적과 정책 성과를 같은 잣대로만 평가하면 이 사건의 절반을 놓치게 돼요. 군대는 계획한 방식으로 싸웠지만 국가는 점령지를 유지할 조건을 끝까지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동북 9성 위치와 평가

9성 반환의 의미를 판단하려면 먼저 어디까지 차지했는지를 알아야 하지만, 바로 그 위치가 아직 풀리지 않았어요. 함흥평야설·길주 이남설·두만강 이북설이 함께 제시되며 하나의 정설로 확정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세 가지 위치설

함흥평야설은 함흥 일대의 지형과 이동 거리를 바탕으로 오랫동안 통용됐어요. 길주 이남설은 고려사에 나오는 성 이름과 지명을 대조해 함흥에서 길주 사이를 주요 범위로 봅니다.

두만강 이북설은 조선 전기 문헌에서 공험진과 선춘령을 북방 경계로 언급한 대목에 기대고 있어요. 반면 이처럼 넓은 지역을 17만 동원군이 장기간 유지할 수 있었는지를 둘러싼 의문도 남습니다.

세 학설 모두 결정적인 물증이 부족하므로 9성을 특정 지역에 있었다고 단정하는 설명은 한 번 더 살펴보는 편이 좋아요. 드라마나 영상물이 서로 다른 지도를 제시하는 까닭도 사료가 비어 있는 자리를 각기 다르게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승리와 실패를 함께 보는 평가

윤관과 별무반은 여진 기병에 대응할 부대를 만들고 실제 원정에서 성과를 냈어요. 동시에 점령지의 주둔·보급·정착 비용을 장기간 감당하지 못해 성을 반환했습니다.

별무반은 문신 중심 조정 아래에서 무반 조직을 대규모로 키우고 운용한 사례이기도 해요. 그러나 반환 뒤 정치적 책임은 지휘부에 돌아갔고, 대규모 동원의 경험과 그에 어울리는 보상 사이에는 간격이 남았습니다.

윤관의 9성은 패전 기록도, 완전한 승전 기록도 아니에요. 전투에서 얻은 땅을 지키려면 성벽 밖에서 계속 돌아갈 사람·물자·정치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기록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저는 9성의 개수만 외우기보다 무엇을 투입했고 왜 유지하지 못했는지를 함께 적어보는 편이 낫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읽을 때 윤관과 별무반은 짧은 승리의 주인공을 넘어, 승리 이후의 비용까지 묻게 하는 역사로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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