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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역사이야기

이순신 23전 23승 전적, 백의종군 출동 명령부터 칠천량·명량해전·거북선·난중일기·노량해전까지

by 역사좋아 2026. 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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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장명 교수 2007·2012년 집계 기준 · 이순신 해전 기록

이순신 23전 23승 전적과 백의종군, 칠천량, 명량해전 기록을 살펴보는 한국사 이야기

이순신 하면 23전 23승이라는 숫자가 자연스럽게 따라와요. 외우기는 쉽지만, 이 숫자만으로는 왜 어떤 전투는 하나로 묶이고 어떤 전투는 따로 세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저는 이순신을 다시 볼수록 무패라는 상징보다 언제 싸우고 언제 싸우지 않을지를 판단한 과정이 더 눈에 들어옵니다. 특히 출동 명령을 거부한 뒤 파직됐고, 그가 우려했던 방향의 작전이 칠천량 패전으로 이어졌다는 흐름은 숫자만으로 설명되지 않아요.

 

23전 23승은 어떻게 만들어진 숫자이고, 실제 해전 기록은 왜 43전 또는 45전으로도 계산될까요. 셈법부터 백의종군, 칠천량과 명량까지 이어서 보면 이순신의 전적보다 판단이 더 크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23전 23승
널리 알려진 표현
43전 38승 5무
2007년 집계
45전 40승 5무
2012년 수정 집계

이순신 23전 23승

23전 23승이 틀렸느냐고 묻기 전에 무엇을 한 번의 해전으로 셌느냐부터 봐야 해요. 같은 전투 기록도 출전 전체를 하나로 묶느냐, 날짜와 장소가 다른 전투를 따로 세느냐에 따라 숫자가 달라집니다.

 

해군사관학교에서 이순신을 연구한 제장명 교수는 2007년 이순신의 전적을 43전 38승 5무로 정리했고, 2012년에는 45전 40승 5무로 수정했습니다. 초안 자료에서는 임진왜란 기간 전체 해전이 47차례이며 그중 이순신이 참가한 전투가 43차례라고 정리하고 있어요.

대표해전과 세부해전

대표해전 방식은 수군이 한 차례 출전해 돌아올 때까지 벌어진 여러 전투 가운데 대표적인 전투를 하나로 세는 방식이에요. 반대로 세부해전 방식은 날짜와 장소가 다른 전투를 각각 별개의 전투로 계산합니다.

 

옥포해전이 좋은 예입니다. 1592년 5월 한 차례 출전에서 옥포와 합포, 적진포에서 각각 전투가 벌어졌기 때문에 묶으면 1전이고 나누면 3전이 돼요.

구분 대표해전 방식 세부해전 방식
계산 기준 한 차례 출전을 중심으로 묶음 날짜·장소가 다른 전투를 각각 계산
옥포·합포·적진포 1전으로 묶을 수 있음 3전으로 계산
전체 숫자 20여 회 수준으로 줄어듦 43회 안팎으로 늘어남

23승에서 사라진 5무

23이라는 숫자는 대표 전투를 묶어 세는 방식에 가까운데, 여기에 모든 전투를 승리로 표현하면서 문제가 생깁니다. 제장명 교수의 집계에는 적선을 격침하지 못했거나 접전 없이 물러난 경우를 포함한 5무가 따로 남아 있기 때문이에요.

 

23이라는 숫자가 널리 퍼진 계기로는 2004년부터 방영된 드라마가 꼽힙니다. 이후 책과 교육 자료에서 23전 23승이라는 표현이 반복되면서 익숙한 공식처럼 자리 잡았다는 설명이에요.

 

재미있는 점은 숫자를 크게 부풀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투 횟수를 줄이면서 전승이라는 서사를 붙였다는 데 있습니다. 숫자 하나가 이해를 쉽게 해주는 동시에 실제 과정은 상당 부분 지워버린 거죠.

 

그래서 저는 23전 23승이라는 표현보다 수십 차례 전투에 참가하면서 함대를 통째로 잃지 않았다는 설명이 더 인상적으로 느껴집니다. 승리 횟수만 세는 것보다 무엇을 보존하면서 전쟁을 이어갔느냐를 같이 보는 편이 이순신의 역할을 더 현실적으로 보여줘요.

백의종군 출동 명령

이순신의 백의종군을 한 번의 사건으로만 기억하면 1597년 출동 명령 거부의 배경도 단순해져요.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5년 전인 1587년에도 이미 상관의 지시와 책임 문제를 겪었습니다.

1587년 첫 번째 백의종군

당시 마흔셋이던 이순신은 함경도 녹둔도에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여진족이 기습하자 적은 병력으로 맞서 일부를 격퇴했지만 피해가 발생했어요.

 

상관인 북병사 이일은 책임을 이순신에게 돌렸고, 이순신이 병력 증원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 일로 첫 번째 백의종군을 하게 됐고 이듬해 여진 정벌에서 공을 세운 뒤 복직했어요.

 

10년 뒤의 결정을 이 사건 하나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명령과 현장 판단이 충돌하고 결과의 책임까지 현장 지휘관에게 돌아갈 수 있다는 상황을 이미 겪었다는 점은 1597년을 볼 때 함께 떠올릴 만합니다.

1597년 두 번째 백의종군

1597년의 백의종군은 훨씬 무거운 사건이었어요. 일본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 휘하의 요시라는 가토 기요마사가 부산에 상륙할 예정이라는 정보를 조선에 흘렸고, 선조와 조정은 수군에 출동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순신은 함대가 움직이는 순간 경로가 노출되고 한 번 패하면 남해의 제해권을 잃을 위험이 있다고 판단해 나가지 않았습니다. 수군만 움직일 것이 아니라 육군과 함께 작전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어요.

 

그 결과 조정을 속이고 임금을 업신여겼다는 죄, 적을 치지 않아 나라를 저버렸다는 죄, 남의 공을 가로채고 모함했다는 죄가 제시됐습니다. 3월 4일 의금부에 갇혔고 선조는 그를 사형에 처하라고 명했어요.

 

우의정 정탁은 신구차를 올려 공과 죄를 함께 봐야 하며 능력 있는 인물을 법 조문만으로 처리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순신은 5월 16일 풀려났지만 권율 밑에서 계급 없이 병사로 복무하게 됩니다.

 

삼도수군통제사가 몇 달 만에 일반 병졸이 됐지만, 출동하지 않았던 판단 자체는 곧 칠천량이라는 결과와 맞닥뜨리게 됩니다.

칠천량 명량해전

결과를 알고 난 뒤 과거의 판단을 평가하는 건 쉽지만, 당시 이순신에게는 칠천량의 결과가 아직 존재하지 않았어요. 그는 자신이 옳다는 사실이 확인되기 전에 왕의 명령을 거부하고 처벌을 감수한 상태였습니다.

칠천량과 남은 12척

이순신이 물러난 뒤 삼도수군통제사 자리는 원균에게 넘어갔습니다. 조정은 원균에게도 부산 쪽으로 나가 일본 수군을 공격하라는 요구를 했어요.

 

1597년 7월 원균이 함대를 이끌고 출동했고 칠천량에서 기습을 받아 조선 수군이 거의 전멸했습니다. 원균도 이 전투에서 죽었고, 5년 동안 구축한 함대가 한 번의 패전으로 무너졌어요.

이순신의 판단
· 부산 방면 출동 거부
· 함대 이동 경로 노출 우려
· 패전 시 남해 제해권 상실 우려
· 육군과 함께 움직여야 한다고 주장
칠천량의 결과
· 같은 방향의 출동 작전 실행
· 일본군의 기습
· 조선 수군 거의 전멸
· 원균 전사

칠천량의 결과가 이순신의 모든 판단을 자동으로 옳게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에요. 다만 그가 출동을 거부하며 우려했던 함대 보존 문제가 실제로 얼마나 큰 위험이었는지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조정은 8월 이순신을 다시 통제사로 불렀고 남은 배는 12척이었습니다. 수군을 없애고 육군에 합치자는 의견이 나오던 상황에서 이순신은 아직 열두 척의 배가 남아 있다는 장계를 올렸어요.

명량과 실제 13척

명량해전에서는 12척이 아니라 13척이 싸웠어요. 장계를 올린 뒤 한 척이 추가로 합류했기 때문에 12척은 장계 시점, 13척은 전투 당일의 숫자입니다.

 

1597년 음력 9월 16일, 양력 10월 26일 울돌목에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난중일기에는 일본 함대가 130여 척으로 기록돼 있고 다른 자료에는 330척 또는 그 이상으로도 나타나지만, 실제 교전에 들어온 규모는 130척 안팎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라고 초안은 정리하고 있어요.

 

전투는 오전 7시에서 8시 사이 시작됐고 초반 조류는 일본군 쪽에 유리했습니다. 약 40분간 교전이 이어진 뒤 정오 무렵 물길의 방향이 바뀌면서 조선군에는 순조, 일본군에는 역조가 됐어요.

 

좁은 물목에서 역류를 맞은 일본 함선은 움직임이 꼬였고 배끼리 충돌하기 시작했습니다. 오후 다섯 시에서 일곱 시 사이 물살이 느려지고 바람이 달라지자 일본군은 물러났고 조선 전선은 한 척도 격침되지 않았어요.

 

13대 130이라는 숫자만 보면 기적 같은 싸움으로 보이지만, 그 숫자만 남기면 울돌목을 고른 판단과 조류가 바뀌는 시간을 계산한 과정은 사라집니다. 통제사 복귀 후 한 달 남짓한 사이 남은 함선을 추슬러 싸울 장소와 조건을 다시 만든 점이 저는 더 현실적으로 대단하게 느껴져요.

거북선 난중일기

이순신 이야기에는 실제 기록과 후대에 커진 이미지가 함께 섞여 있어요. 거북선과 난중일기를 같이 보면 무엇이 전쟁의 실제 모습에 가까웠는지 구분하기가 조금 쉬워집니다.

 

거북선이 실전에 처음 투입된 것은 1592년 사천해전이었습니다. 이순신은 1591년 2월 전라좌수사로 부임했고 1년 남짓한 기간 안에 새 함선을 준비해 전쟁이 시작된 직후 실전에 투입했어요.

 

다만 거북선의 지붕이 나무판이었는지 철판이었는지는 초안 자료에서도 논쟁이 끝나지 않은 부분으로 정리됩니다. 철갑선이라는 설명을 뒷받침하는 당대 조선 기록은 없고 일본 측 기록을 둘러싼 주장과 반론도 맞서고 있어요.

 

거북선의 정확한 수량도 분명하지 않으며 서너 척 정도였다는 견해가 일반적이라고 제시돼 있습니다. 조선 수군의 주력은 판옥선이었고 거북선은 적진을 먼저 헤집는 돌격선에 가까웠으며, 화포를 실은 판옥선이 거리를 두고 공격하는 방식이 실제 전술의 중심이었다는 설명이에요.

 

난중일기는 1592년 1월 1일부터 1598년 11월 17일까지 이어지는 기록입니다. 원래 여덟 권이었지만 1595년 기록이 빠져 일곱 책이 남았고 2013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어요.

 

전쟁을 직접 지휘한 사령관이 매일 남긴 개인 일기라는 점이 등재 이유로 언급됩니다. 내용에는 전투뿐 아니라 날씨와 지형, 백성의 형편, 어머니에 대한 걱정과 셋째 아들 면의 죽음, 잠을 이루지 못한 날과 병사를 처벌한 기록까지 함께 남아 있어요.

 

23전 23승이라는 표현은 한 사람을 아주 깔끔하게 정리해주지만 난중일기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판단을 망설이고 걱정하며 때로는 부하를 엄하게 처벌해야 했던 지휘관의 하루가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에요.

기록과 후대 이야기는 구분해서 보기

명량에서 쇠사슬을 걸어 적선을 막았다는 이야기는 사료로 확인되지 않으며 후대에 덧붙은 설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고 초안은 정리합니다. 거북선을 완전한 철갑선으로 보는 설명도 논쟁이 남아 있어요.

노량에서 일부러 갑옷을 벗고 죽음을 택했다는 자살설 역시 확인할 방법이 없는 해석으로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노량해전 전적

이순신의 마지막 전투도 승패 숫자만으로 보면 놓치는 장면이 많아요. 1598년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일본군에 철수 명령이 내려지면서 전쟁은 끝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순신은 철수하는 일본 함대를 그대로 보내지 않았고 음력 11월 19일 새벽 노량에서 마지막 전투를 벌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총탄을 맞고 쉰넷의 나이로 전사해요.

 

조선 후기 문헌에 이순신이 갑옷을 벗고 싸웠다는 서술이 있다는 점에서 자살설도 따라붙었습니다. 전쟁 뒤 선조가 자신을 다시 처벌할 것을 예상해 죽음을 택했다는 해석이지만 확인할 방법은 없어요.

 

다만 이런 이야기가 오랫동안 남았다는 사실은 선조와 이순신의 관계가 후대에도 편안하게 기억되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하게 합니다. 실제로 초안에는 선조가 전쟁 뒤 논공행상에서 이순신을 처음부터 가장 높은 자리에 두려 하지 않았다는 기록도 제시돼 있어요.

 

이순신이 선무공신 1등에 오른 것은 전사한 지 6년 뒤인 1604년이었습니다. 살아 있을 때 사형 명령까지 받았던 지휘관이 사후에는 나라를 대표하는 영웅으로 굳어지는 과정 역시 단순한 전승 숫자로는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는 43전이냐 45전이냐, 23승이냐 40승이냐를 정확히 따지는 일이 이순신을 깎아내리는 작업이라고 보지 않아요. 오히려 숫자의 기준을 걷어내면 불리한 상황에서 지형과 조류, 보급과 함대 보존을 계속 계산한 지휘관의 모습이 더 또렷해집니다.

 

특히 출동 명령을 거부한 장면은 결과를 알고 있는 지금보다 당시가 훨씬 무거웠을 거예요. 그때는 칠천량도 명량도 아직 일어나지 않았고, 자신의 판단이 맞다는 보장 없이 왕의 명령과 목숨을 걸고 결정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책임 있는 자리에 있다고 해서 지시를 그대로 수행하는 것과 책임 있게 판단하는 일이 항상 같은 방향으로 가지는 않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손실이 보인다면 싸우지 않는 결정도 지휘의 일부가 될 수 있다는 점이 이순신의 기록에서 오래 남아요.

 

영웅을 신화로 만들면 감탄하기는 쉬워집니다. 하지만 모든 싸움에 뛰어들어 이긴 사람보다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알고 싸울 조건을 골랐던 사람으로 볼 때, 이순신이라는 인물에게서 가져갈 수 있는 이야기는 오히려 더 많아집니다.

 

23전 23승이라는 숫자는 외우기 쉽습니다. 그 숫자를 조금 걷어내고 나면 매번 결과를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무엇을 지키고 어떤 싸움을 선택할지 판단해야 했던 지휘관이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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