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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역사이야기

을미사변 삼국간섭, 미우라 고로·건청궁, 외국인 목격자·증거, 히로시마 재판 56명, 단발령·아관파천과 주권

by 역사좋아 2026. 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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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5~1897년 을미사변·아관파천 흐름 정리

을미사변 미우라 고로와 건청궁, 히로시마 재판 56명 전원 석방 과정

1895년 10월 8일 새벽, 명성황후가 경복궁 안에서 살해됩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더 이상하게 만드는 장면은 몇 달 뒤 일본에서 열렸던 재판이에요.

 

관련자 56명이 재판에 넘겨졌지만 결과는 전원 석방이었습니다. 저는 을미사변을 볼 때 사건 자체만큼이나, 이렇게 큰 사건에 결국 아무도 형사적 책임을 지지 않았다는 사후 처리가 더 무겁게 느껴져요.

 

목격자도 있었고 사건을 조선 내부 정변처럼 보이게 하려는 움직임도 드러났지만 책임으로 이어지지는 못했습니다. 사실이 존재하는 것과 그 사실에 책임을 물을 힘이 있다는 것은 다른 문제였던 거죠.

삼국간섭과 을미사변

을미사변은 어느 날 갑자기 궁궐 안에서 시작된 사건이 아니었어요. 청일전쟁이 끝난 뒤 조선을 둘러싼 힘의 균형이 빠르게 바뀌면서 배경이 만들어졌습니다.

삼국간섭 뒤 러시아로 기운 조선

1894년 시작된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1895년 4월 시모노세키조약을 통해 요동반도를 얻었어요. 그러나 러시아·프랑스·독일이 반환을 요구한 삼국간섭이 벌어지자 일본은 결국 물러섭니다.

 

조선 왕실이 여기서 본 것은 일본도 밀릴 수 있다는 사실이었어요. 왕실은 러시아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고 명성황후가 그 외교 노선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일본으로서는 청을 밀어낸 자리를 러시아가 차지하는 상황이 된 거죠. 외교 노선을 다시 돌리기 어려워지자 노선을 이끄는 사람 자체를 제거하는 계획이 등장합니다.

흥선대원군과 훈련대

계획에는 사건을 일본의 행동보다 조선 내부 정변처럼 보이게 만들 장치가 필요했어요. 그 역할에 흥선대원군과 일본식 훈련을 받은 조선 훈련대가 등장합니다.

 

대원군은 명성황후와 오랫동안 대립해 동기가 있어 보이는 인물이었고, 훈련대는 해산 명령으로 불만이 쌓여 있었어요. 원한이 있는 왕실 인사와 불만을 가진 군대가 움직였다면 내부 정변이라는 설명을 만들기 쉬웠습니다.

 

원래 계획된 날짜는 10월 10일이었지만 훈련대 해산 일정이 앞당겨지면서 사건 날짜도 10월 8일 새벽으로 당겨졌어요. 흥선대원군이 계획에 어느 정도 동의했는지는 논쟁이 남아 있고, 확인되는 것은 그가 그날 새벽 궁으로 들어갔다는 사실까지입니다.

사건을 둘러싼 첫 번째 싸움

시해만큼 중요했던 것은 누가 벌인 사건으로 보이게 만드느냐였어요. 처음부터 책임을 조선 내부로 돌릴 수 있는 구도가 함께 준비됐습니다.

 

사건 이후의 대응을 보면 원인을 밝히는 일과 책임을 줄이는 일이 동시에 움직이고 있었다는 점이 드러나요.

미우라 고로와 건청궁

사건의 실행 과정을 따라가면 우발적인 충돌이라고 보기 어려운 준비가 보여요. 새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가 부임한 지 불과 37일 만에 왕비가 살해됐습니다.

부임 37일 만의 작전

미우라 고로는 1895년 9월 1일 일본 공사로 부임했어요. 육군 중장 출신이었고, 10월 3일 공사관 지하에서 세부 계획이 마련됐다고 전합니다.

 

계획에는 ‘여우 사냥’이라는 작전명까지 붙었어요. 일본 정부가 어디까지 알고 있었는지는 논쟁거리로 남아 있고, 일본 정부는 오랫동안 미우라 개인의 독단이라는 설명을 유지했습니다.

10월 8일 건청궁

10월 8일 새벽 3시 대원군이 공덕리 거처를 떠났고, 새벽 4시 30분 무렵 광화문 쪽에서 총격이 시작됐어요. 새벽 5시 무렵에는 대원군 일행이 광화문에 도착했습니다.

 

궁에 들어간 인원에는 일본군 수비대, 규슈 출신 낭인 30여 명, 일본 공사관 직원과 순사, 조선 훈련대가 포함돼 있었어요. 낭인 가운데에는 조선에서 발행되던 일본계 신문 한성신보 관계자들도 있었습니다.

 

왕비가 머물던 곳은 경복궁 북쪽 깊숙한 건청궁이었어요. 새벽 5시 50분에서 6시 사이에 시해가 이뤄졌고 왕과 왕세자는 궁 안에 붙잡혀 있는 상태였습니다.

 

시해 뒤 시신은 건청궁 동쪽으로 옮겨져 장작더미 위에서 불태워졌어요. 시신을 없애 사건을 확정할 물적 증거를 지우려는 방향의 조치였습니다.

 

사건 직후에는 조선 조정 명의로 왕비를 폐위한다는 조서까지 나왔어요. 죽은 뒤 신분까지 없앤다면 살해된 사람이 왕비였다는 정치적 의미도 약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시점 움직임
9월 1일 미우라 고로 일본 공사 부임
10월 3일 공사관에서 세부 계획 마련
10월 8일 새벽 궁궐 진입과 건청궁 시해
사건 직후 시신 소각과 폐비 조서

살해 뒤 무엇을 했는지를 보면 무엇을 지우고 싶었는지도 보여요. 시신과 신분을 함께 없애려는 조치는 사건의 책임까지 흐리려는 방향과 맞닿아 있었습니다.

외국인 목격자와 증거

계획대로라면 사건을 조선 내부의 권력 충돌로 설명할 여지가 있었어요. 그러나 현장에 일본과 조선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외국인 목격자가 있었습니다.

 

러시아인 세레딘 사바틴은 당시 고종의 호위 업무를 맡고 있던 건축기사였어요. 미국인 윌리엄 다이 역시 조선군을 훈련하던 인물로 현장에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현장에서 폭행을 당했지만 살아남아 증언했어요. 이들의 증언은 각국 공사관을 통해 퍼져나갔고 일본이 사건을 전면 부인하기 어려운 조건이 만들어졌습니다.

 

러시아 대리공사 베베르는 일본 공사를 주모자로 지목하는 데 앞장섰어요. 미국과 러시아를 비롯한 나라들도 폐비 조서의 인준을 거부했고 일본을 제외한 다른 나라들이 같은 태도를 보였습니다.

 

결국 폐비 조서는 두 달여 만에 취소됐고 왕후의 지위가 복구됩니다. 다만 장례는 2년 넘게 미뤄졌고 1897년 11월에야 국장이 치러졌어요.

 

여기서 사건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외국인 증언까지 있어 사건 자체를 완전히 덮지는 못했는데, 정작 책임자를 처벌하는 단계에서는 다시 다른 결과가 나왔어요.

히로시마 재판과 56명

을미사변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숫자는 56명일 수 있어요. 일본은 관련자들을 본국으로 불러 재판에 세웠지만 그 56명이 모두 풀려났습니다.

 

기소된 사람은 군인 8명과 민간인 48명이었어요. 재판은 히로시마에서 열렸고 1896년 1월 20일 판결이 나왔습니다.

56명
재판에 넘겨진 관련자
8명
군인
48명
민간인

판결은 전원 면소·석방이었고 이유는 증거 불충분이었어요. 한 나라의 왕비가 살해된 사건이 재판까지 갔지만 형사처벌을 받은 사람은 한 명도 남지 않았습니다.

 

더 묘한 것은 이후 현장에 있었던 가담자들이 남긴 기록이 여러 차례 발견됐다는 점이에요. 재판에서는 증거가 부족하다고 했지만 당사자들은 자신이 한 일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었습니다.

 

미우라 고로 역시 석방된 뒤 일본 정계에서 활동했어요. 반면 조선에서는 훈련대 관계자 등 실행에 가담한 일부 조선인이 처벌받았습니다.

 

실행에 가담한 조선인을 처벌한 것 자체가 이상한 것은 아니에요. 다만 계획을 주도한 쪽에서는 처벌받은 사람이 없고 동원된 쪽에서는 사형까지 나왔다는 대비가 남습니다.

확인된 사건의 흔적
· 외국인 현장 목격자
· 각국 공사관을 통한 증언 확산
· 이후 발견된 가담자 기록
재판 결과
· 56명 기소
· 증거 불충분
· 전원 면소·석방

이 대목을 보면 증거가 존재하는 것과 그 증거가 책임을 만들어내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어요. 형식적인 재판 절차가 존재했다고 해서 책임까지 실현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증거 불충분’이라는 판결문은 법률 문구이지만, 이 사건에서는 당시 누가 판단권을 쥐고 있었는가라는 문제까지 함께 떠올리게 합니다.

단발령 아관파천과 주권

을미사변은 재판으로 마무리되지 않고 조선 내부 정치까지 흔들었어요. 왕비 시해 뒤 추진된 개화 정책과 일본에 대한 반감이 한꺼번에 겹칩니다.

단발령과 을미의병

1895년 12월 30일 단발령이 공포되고 고종과 황태자가 먼저 머리를 잘랐어요. 이후 관리들이 거리와 성문에서 백성의 상투를 강제로 자르는 방식으로 시행됐습니다.

 

당시에는 머리카락 자체보다 부모에게 받은 몸을 훼손하지 않는다는 관념과 정체성 문제가 컸어요. 여기에 왕비를 시해한 일본이 미는 개화 정책이라는 인식까지 겹치면서 반발은 훨씬 커졌습니다.

 

전국에서 을미의병이 일어났고 유생과 농민이 참여했어요. 단발령은 1897년에 일단 철회됩니다.

궁궐을 떠난 고종

1896년 2월 11일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어요. 자기 궁궐을 안전한 장소로 믿지 못하게 된 결과가 아관파천이었습니다.

 

고종은 약 1년 동안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렀고 1897년 2월에 환궁합니다. 그 기간 열강은 광산·삼림·철도 이권을 가져갔고 한 나라에 내준 조건이 다른 나라의 요구로 이어지는 상황도 벌어졌어요.

 

1897년 10월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가 됩니다. 죽은 왕비에게도 명성황후라는 시호가 올려졌어요.

 

이름과 지위는 되돌릴 수 있었지만 사건의 책임까지 되돌리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건을 보면 주권이라는 말도 조금 더 현실적으로 다가와요.

 

왕이 있고 궁궐이 있고 나라 이름이 있다고 해서 국가의 힘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자기 땅에서 벌어진 일을 조사하고 잘못한 사람에게 실제로 책임을 물을 수 있어야 그 힘이 작동한다고 볼 수 있겠죠.

 

을미사변 당시 조선은 바로 그 부분에서 너무 약했어요. 사건은 자기 궁궐에서 벌어졌지만 주요 관련자를 재판한 곳도, 최종적으로 풀어준 곳도 일본이었습니다.

 

건청궁은 훗날 일제강점기에 헐렸고 지금의 건물은 2007년에 복원된 것입니다. 사건을 설명하는 공간은 다시 만들 수 있었지만 당시 사라진 책임까지 복원할 수는 없었어요.

 

명성황후는 이름을 돌려받았지만 사건의 책임까지 돌아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을미사변을 기억할 때 시해의 충격만큼 왜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는지를 함께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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