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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역사이야기

흥선대원군 집권 10년, 서원 철폐·호포제와 경복궁 중건·당백전, 병인양요·신미양요·척화비, 임오군란 재집권과 평가

by 역사좋아 2026. 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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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63~1873년 흥선대원군 집권기 흐름 정리

흥선대원군 집권 10년 서원 철폐와 호포제, 경복궁 중건과 당백전 정책 정리

흥선대원군에게는 개혁가라는 평가와 조선을 더 어려운 길로 몰고 갔다는 평가가 동시에 붙어요. 이상한 일이 아니라, 실제로 두 평가를 뒷받침하는 정책이 한 사람의 10년 안에 함께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시기를 볼 때 정책을 한꺼번에 좋다거나 나쁘다고 묶기보다 자산과 부채를 따로 적어보는 편이 더 이해하기 쉽다고 봅니다. 서원과 양반의 특권을 건드릴 때 적용한 기준이 왕실의 권위를 세울 때도 똑같이 적용됐는지를 보면 평가가 조금 달라져요.

 

대외정책도 비슷합니다. 문을 닫았다는 사실 하나보다 그렇게 시간을 벌어놓고 무엇을 준비했는지를 따라가 보면 흥선대원군 집권 10년의 성과와 한계가 함께 보이죠.

흥선대원군 집권 10년

흥선대원군의 정치는 처음부터 조선에 익숙한 형태가 아니었어요. 열두 살 왕의 친아버지가 살아서 아들의 나라를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상황이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1863년 12월 철종이 후사 없이 죽자 왕실 최고 어른인 조대비가 후계를 정하게 됐어요.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이 왕위에 올랐고, 그가 고종입니다.

 

대원군은 원래 왕의 친아버지에게 붙는 칭호였지만 이전에는 대부분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어요. 살아 있는 대원군으로서 아들의 정치를 이끈 이하응은 처음부터 이전과 다른 권력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그가 안동 김씨의 견제를 피하려 일부러 어리석은 사람처럼 행동했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지만 확인하기 어려운 일화도 섞여 있어요. 다만 세도정치 아래에서 왕족이 안전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는 점은 이 시기의 배경으로 볼 수 있습니다.

 

1864년 1월부터 1873년 11월까지 이어진 약 10년 동안 대원군은 아주 다른 방향의 정책들을 동시에 밀어붙였어요. 그래서 정책별로 떼어놓고 보는 편이 한 사람의 성격으로 모든 결과를 설명하는 것보다 낫습니다.

자산으로 볼 정책
· 서원 정리
· 호포제
· 사창제
· 비변사 혁파
부채로 볼 정책과 판단
· 경복궁 중건 비용
· 당백전 발행
· 대외 충돌의 해석
· 준비로 이어지지 못한 시간

좋은 정책 몇 개가 나쁜 판단을 없애주지도 않고, 큰 실수 하나가 모든 개혁을 없던 일로 만들지도 않아요. 그래서 흥선대원군은 결정 하나씩 따로 볼수록 더 복잡해지는 인물입니다.

서원 철폐와 호포제

대원군이 기존 특권층을 건드릴 때는 상당히 과감했어요. 서원과 군포 문제는 조선 후기에 오래 쌓인 문제였지만 쉽게 손대기 어려운 영역이었습니다.

수백 곳의 서원을 47곳으로

서원은 원래 선비를 교육하고 이름난 학자를 제사 지내는 공간이었어요. 하지만 서원이 가진 토지에는 세금이 붙지 않고 소속된 사람에게 군역이 면제되는 특권도 있었습니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서원은 세금과 병역을 피하는 통로가 되기도 했고, 일부 지역에서는 운영비 명목으로 백성에게 곡식을 걷었어요. 정치적으로는 붕당의 지역 거점 역할도 했습니다.

 

대원군은 1865년 만동묘를 폐지하면서 먼저 노론의 정신적 중심을 건드렸어요. 1868년에는 사액을 받지 않은 서원을 정리하고 1870년에는 사액 서원까지 조사했습니다.

 

1871년 3월 20일 최종 철폐령이 내려졌고 전국에서 47곳만 남았어요. 유생들이 한양으로 올라와 항의했지만 대원군은 집회를 해산시키고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세금을 걷을 수 있는 토지와 군역 대상이 늘어나는 효과가 있었지만 정치적 비용도 컸어요. 사대부와 유생 상당수가 대원군에게 등을 돌렸고, 10년 뒤 그가 권력에서 밀려날 때 이 세력이 다시 등장합니다.

양반도 부담한 호포제

1871년 시행된 호포제도 같은 방향이었어요. 영조의 균역법이 군포를 2필에서 1필로 줄였지만 양반은 여전히 군포 부담에서 빠져 있었습니다.

 

대원군은 사람 단위가 아니라 집 단위로 부담시키는 방식으로 바꾸면서 양반 집에도 군포를 물렸어요. 세종이나 영조도 넘지 않았던 선을 건드린 조치였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환곡의 폐단을 줄이기 위해 사창제도 시행했어요. 관청이 운영하던 곡식 대여를 마을 단위 자치 운영으로 돌리는 방식이었습니다.

 

세도 가문의 정치적 근거지로 변한 비변사도 없앴어요. 이 정책들을 나란히 놓으면 기존 특권층이 차지하던 몫을 국가 쪽으로 되돌리려는 방향이 공통적으로 보입니다.

정책 건드린 문제 방향
서원 철폐 면세·면역과 지역 특권 서원을 47곳만 남기고 정리
호포제 양반의 군포 면제 양반 집에도 부담
사창제 환곡의 폐단 마을 단위 운영으로 전환
비변사 혁파 세도 가문의 정치 기반 기존 권력 구조 정리

대원군은 남이 가진 특권을 찾아내고 깨는 데는 확실히 강했어요. 문제는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왕실 권위에도 똑같은 비용 기준을 적용했느냐는 데서 시작됩니다.

경복궁 중건과 당백전

경복궁 중건으로 넘어오면 앞의 개혁과는 다른 모습이 보여요. 특권층의 비용에는 엄격했던 사람이 왕실 권위를 회복한다는 목표 앞에서는 훨씬 큰 부담을 감수했습니다.

270년 만의 경복궁 공사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불탄 뒤 270년 동안 폐허로 남아 있었어요. 조선 왕들은 창덕궁을 사용했고 굳이 경복궁을 다시 세우지 않았습니다.

 

대원군은 1865년 경복궁 중건을 시작했어요. 세도정치로 약해진 왕실 권위를 눈에 보이는 형태로 다시 세우겠다는 명분이었습니다.

공사비가 8천만 냥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있고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원납전을 걷었어요. 이름은 자발적인 기부금이었지만 실제로는 할당에 가까웠고 성문 통행세인 문세와 토지에 대한 추가 부담도 생겼습니다.

 

1866년에는 공사에 쓰려고 쌓아둔 목재에 큰불이 나면서 비용 부담이 더 커졌어요. 전국의 큰 나무를 징발했고 무덤가에 심어둔 나무까지 베어갔다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반년을 흔든 당백전

재정이 부족해지자 1866년 11월부터 당백전 주조가 시작됐어요. 상평통보의 100배라는 액면가를 붙였지만 실제 금속 가치는 5~6배 정도였습니다.

 

1866년 12월 쌀 한 석 가격은 약 700문이었는데 1867년에는 4000문을 넘어섰어요. 반년 만에 다섯 배가 넘게 뛰었고 화폐에 대한 신뢰도 크게 흔들렸습니다.

 

당백전은 178만 개 넘게 주조된 뒤 1867년 발행이 중단됐어요. 유통 기간은 반년 남짓이었고 회수된 화폐는 녹여 다시 재료로 사용했습니다.

8천만 냥
경복궁 공사비 기록
5배+
쌀값 상승 폭
178만 개+
당백전 주조 수량

서원과 양반의 특권을 줄이면서 확보하려 했던 국가의 기반이 왕실 권위를 위한 공사에서 다시 압박받은 모습이에요. 좋은 개혁을 했다는 사실이 이 판단의 비용을 상쇄해주지는 않습니다.

 

개혁의 기준이 남에게만 엄격하면 오래가기 어려워요. 자신이 중요하다고 믿는 사업에도 같은 잣대를 적용할 수 있느냐가 더 어려운 문제입니다.

병인양요 신미양요와 척화비

대외정책에서도 결과와 원인을 구분하지 않으면 판단이 달라져요. 프랑스와 미국 함대가 물러난 사실과 조선이 군사적으로 상대를 이겼다는 평가는 같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의 경험

1866년 천주교도를 대규모로 처형한 병인박해에서 프랑스 신부 아홉 명이 죽었고, 같은 해 프랑스 함대가 조선에 왔어요. 병인양요에서 프랑스군은 강화도를 점령하고 한 달여 머문 뒤 물러났습니다.

 

이 과정에서 외규장각 도서가 약탈됐어요. 같은 해 대동강에서는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불탔고, 5년 뒤인 1871년 미국 함대가 강화도로 들어옵니다.

 

신미양요 때 광성보에서는 어재연이 이끄는 조선군이 거의 전멸했어요. 초안에 제시된 집계로는 조선군 사망자가 350명 안팎, 미군 전사자는 세 명이었습니다.

 

미국은 조선이 협상에 응하지 않자 물러났어요. 조선에서는 두 차례 모두 외국군을 물리친 경험으로 받아들였지만, 상대가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철수한 것과 전투력에서 이긴 것은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척화비와 닫아둔 시간

1871년 대원군은 전국 주요 지점에 척화비를 세웠어요. 서양 세력과 화친하는 행위를 나라를 파는 일과 연결하는 논리를 돌에 새겨 정책 방향을 고정했습니다.

 

당시 개항이 곧 안전한 선택이었다고 단정하기도 어려워요. 실제로 5년 뒤 강화도조약은 조선에 불리한 조항을 담고 있었습니다.

문을 닫는 것과 시간을 쓰는 것은 다른 문제

외부 변화가 위험하다고 보고 당장 문을 열지 않는 선택 자체가 항상 틀렸다고 보기는 어려워요. 문제는 그렇게 확보한 시간 동안 상대를 연구하고 다음 선택지를 준비했느냐는 데 있습니다.

초안의 흐름대로 보면 대원군 집권 10년 동안 조선은 바깥 상황을 파악하거나 일본의 변화를 따라가기 위한 준비에서 뚜렷한 성과를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시간을 버는 선택은 그 시간을 실제 준비에 사용할 때 전략이 됩니다. 준비 없이 결정을 뒤로 미루기만 하면 나중에는 더 불리한 조건에서 같은 문제를 만나게 되죠.

임오군란 재집권과 평가

1873년 대원군이 권력에서 물러났다고 그의 정치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어요. 9년 뒤 임오군란이 터지면서 다시 권력 중심에 들어옵니다.

 

1873년 11월 최익현은 고종이 이미 성인이니 직접 정치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어요. 뒤에는 명성황후와 서원 철폐 이후 대원군에게 등을 돌린 유림 세력이 있었습니다.

 

1882년 신식 군대와 차별받던 구식 군인들이 봉기한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대원군은 다시 불려 나왔어요. 7월 23일 재집권한 뒤 잡세를 없애고 화폐 남발을 막는 조치를 내놓았습니다.

 

하지만 8월 26일 청군이 대원군을 붙잡아 갔어요. 재집권 기간은 33일이었고 그는 톈진에서 약 3년 동안 억류된 뒤 1885년에 돌아옵니다.

 

이후에도 권력과의 연결은 계속됐고 1894년에는 일본이 갑오개혁 과정에서 그를 다시 앞세우기도 했어요. 이 시기의 대원군은 처음처럼 판을 주도하기보다 청과 일본이 만든 상황 속에 다시 등장하는 모습에 가까웠습니다.

 

1898년 대원군이 세상을 떠날 때 조선은 이미 대한제국으로 이름을 바꾼 뒤였어요. 그가 왕위에 올린 고종은 황제가 되어 있었고, 오랫동안 대립했던 명성황후는 3년 전 궁 안에서 살해된 상태였습니다.

 

그 사건에 대원군이 어느 정도 관여했는지는 논쟁이 남아 있어요. 일본이 그를 앞세우려 했다는 정황과 사건 당일 궁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초안에서도 확정된 결론은 없다고 선을 긋고 있습니다.

 

흥선대원군의 10년을 자산과 부채로 나눠보면 한 가지 차이가 눈에 들어옵니다. 서원 철폐와 호포제 같은 자산은 다른 특권층의 몫을 줄이는 정책이었고, 큰 부채는 자신이 중요하게 여긴 왕실 권위와 대외 판단에서 생겼어요.

 

그래서 그를 단순히 유능한 개혁가나 쇄국의 책임자로만 정리하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추진력이 강했던 만큼 그 추진력을 멈추고 자기 판단을 다시 확인할 장치도 필요했던 인물이었어요.

 

조직에서도 다른 사람의 낭비는 쉽게 보이지만 자신이 중요하다고 믿는 사업에는 금방 예외가 붙곤 하죠. 개혁이 남의 특권을 줄이는 데서 끝나지 않고 자기 결정에도 같은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는 점에서 이 10년은 꽤 현실적인 사례로 읽힙니다.

 

흥선대원군에게 부족했던 것은 밀어붙일 힘이 아니었는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방향에도 같은 잣대를 대고, 필요할 때 그 힘을 멈춰 세울 기준이 더 필요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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