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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역사이야기

개경 입지와 성곽, 나성 공사와 동원부터 성문·행정구역·시전·벽란도·기록·내성까지

by 역사좋아 2026. 9.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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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수도 개경 · 성곽·행정·상업의 수치와 의미

고려 수도를 떠올리면 왕과 권력 다툼은 익숙하지만, 사람들이 살던 도시의 크기와 장사하던 거리는 선뜻 그려지지 않아요. 성벽의 길이와 성문 수를 따라가면 인물 중심의 역사에서는 잘 보이지 않던 개경이 나타나요.

저는 도시를 설명하는 큰 숫자를 발전의 성과로만 읽는 시선이 불편해요. 약 23km의 성벽과 약 30만 4천 명의 동원을 함께 놓으면, 무엇을 완성했는지 못지않게 누구의 수고로 유지했는지를 묻게 되니까요.

개경의 나성 공사는 거란과 전쟁을 치르던 시기와 겹쳐 있어요. 다만 전쟁이 도시를 만들었다는 해석과, 도시의 모든 배치를 전쟁으로 설명하는 단정은 구분할 필요가 있어요.

개경 나성 23km, 성벽의 규모 뒤에 놓인 누구의 노동인가라는 질문

개경 입지와 성곽

수도가 됐다고 도시 전체를 감싼 성벽까지 한꺼번에 생긴 것은 아니에요. 왕건은 건국 이듬해인 919년 철원에서 송악 남쪽으로 도읍을 옮겼지만, 바깥 성곽인 나성은 훨씬 뒤에 마련됐어요.

송악은 왕건 집안의 근거지였고, 예성강과 임진강 사이에서 바다로 나가는 길과도 가까웠어요.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는 방어에 활용할 지형을 제공했지만, 도시가 넓어질 평지는 제한적이었어요.

개경의 공간을 읽을 때 반듯한 바둑판부터 떠올리면 지형을 놓치기 쉬워요. 도시의 길과 구역이 구부러진 모습을 계획의 부족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산과 평지의 조건을 함께 봐야 해요.

성곽은 안쪽부터 궁성·황성·나성으로 구분해 볼 수 있어요. 궁성은 만월대를 포함한 왕실 공간, 황성은 관청이 모인 공간, 나성은 도시를 넓게 감싸는 바깥 성곽에 해당해요.

이 구분은 성곽마다 보호하려는 공간과 기능이 달랐다는 점을 보여줘요. 그렇다고 왕실·행정·주거·상업이 서로 섞이지 않는 별개의 도시였다고 받아들일 필요는 없어요.

저는 안쪽 성곽이 먼저 마련되고 도시 바깥의 나성이 뒤따랐다는 순서에 주목해요. 다만 이 순서만으로 건국 초에는 외부 위협이 없었다거나, 백성 보호를 의도적으로 외면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어요.

개경 나성 공사와 동원

성벽 약 23km는 완성된 도시의 크기일까요, 그 도시를 만드는 데 든 부담의 크기일까요? 개경 나성은 둘레만 볼 때와 동원 인원을 함께 볼 때 인상이 달라져요.

나성 공사는 1009년에 시작해 1029년, 현종 20년에 마무리된 것으로 정리돼요. 강감찬의 건의와 이가도의 감독이 연결되는 공사로, 동원 인원은 약 30만 4천 명으로 제시돼요.

항목 수치 읽을 때의 구분
착공·완공 1009년·1029년 시작·종료 연도를 포함하면 21개 연도
동원 인원 약 30만 4천 명 동시 투입 인원인지 별도 확인 필요
나성 둘레 약 23km 성벽 길이와 도시 면적은 다른 수치

이 기간에는 1010년 거란의 2차 침입과 1018년 3차 침입이 놓여 있어요. 공사와 전쟁이 겹쳤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그것만으로 전쟁이 대규모 동원을 가능하게 한 유일한 이유였다고 말하기는 어려워요.

저도 역사 내용을 메모할 때 건축물 이름 옆에 길이와 완공 연도만 적고 넘어간 적이 있어요. 숫자가 크면 그만큼 강한 나라였겠다고 생각해서, 누가 어떤 부담을 졌는지는 따로 묻지 않았어요.

개경 나성을 정리하며 약 23km 옆에 약 30만 4천 명을 함께 놓으니, 완성된 성벽만 떠올리던 방식이 걸렸어요. 거란의 침입 시기까지 나란히 보자 같은 공사가 방어 시설인 동시에 사람을 동원해야 하는 사업이었다는 점이 더 크게 다가왔어요.

그렇다고 동원 인원만 보고 개개인의 고통이나 공사 현장의 사정을 안다고 할 수는 없어요. 저는 이 숫자를 국가의 능력을 칭찬하는 데만 쓰지 않고, 그 능력이 누구의 노동에 기대었는지 묻는 출발점으로 읽으려 해요.

개경 성문과 행정구역

도시를 성벽으로 둘렀다면, 그 안팎의 이동과 안쪽의 사람들은 어떻게 관리했을까요? 성문 25개와 5부 35방 344리는 개경을 지키는 일과 운영하는 일을 함께 생각하게 해요.

성문 25개는 방어의 포기였을까

문의 수만으로 방어력을 포기했다고 판단하기는 어려워요. 나성의 문은 대문 4개, 중문 8개, 소문 13개로 모두 25개였어요.

둘레 약 23km를 문 25개로 나누면 평균 간격은 약 920m예요. 다만 이는 단순 계산값이지, 실제 성문이 같은 간격으로 배치됐다는 뜻은 아니에요.

성벽은 지형에 따라 돌로 쌓거나 흙으로 다졌고, 석축 구간은 너비 약 6m, 높이 약 3~4m로 전해져요. 일부 구간의 규격과 성문 수만으로 나성을 단순한 경계선이라고 규정하면 방어 기능을 너무 쉽게 지우게 돼요.

저는 성문을 방어와 통행 중 어느 하나를 포기한 흔적보다, 두 요구를 함께 감당해야 했던 시설로 보는 편이 타당하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살고 물자가 들어오는 수도는 성벽을 닫아놓는 것만으로 유지할 수 없으니까요.

5부 35방 344리가 보여주는 관리의 범위

1024년에는 개경의 행정구역이 5부 35방 344리로 정비돼요. 중·동·서·남·북의 다섯 부 아래에 방을 두고, 그 아래에 리를 두는 구분이에요.

행정구역과 도로 모양은 달라요

5부·35방·344리는 행정 단위의 수예요. 개경이 물리적으로 반듯한 344칸의 격자로 나뉘었다는 뜻은 아니에요.

행정구역의 세분화는 호적과 부역, 치안 같은 일을 어디를 기준으로 나눠 맡을지와 연결해 생각할 수 있어요. 다만 나성 완공보다 5년 앞선 정비라는 사실만으로 공사 인력을 확보하려고 구역을 나눴다고 확정할 수는 없어요.

처음 메모하던 방식대로라면 344리 역시 도시가 정교해졌다는 표시로만 남겼을 거예요. 이제는 구역을 세밀하게 나눈 일이 행정의 편의뿐 아니라 사람을 파악하고 부담을 배분하는 문제와도 닿아 있다는 점을 함께 보게 됐어요.

개경 시전과 벽란도

성벽 안을 정리했다고 수도의 생활까지 저절로 굴러가지는 않아요. 개경에는 물건을 거래할 거리와 바깥에서 사람·물자가 들어올 항구가 함께 필요했어요.

남대가의 시전과 국가의 감독

개경의 시전은 남대가라는 큰길을 따라 배치됐어요. 십자가라 불린 교차로에서 북쪽으로 흥국사를 지나 황성 동문인 광화문에 이르는 구간의 양편에 장랑을 세우고 점포를 들였어요.

장랑은 칸칸이 이어진 긴 행랑 형태의 상설 점포 건물이에요. 물건을 사고파는 자리를 건물로 마련했다는 점에서 일시적인 노점과 구분할 수 있어요.

시장 감독을 맡은 경시서는 목종 때 설치돼 문종 때 확대됐고, 물가와 미곡 매매를 살폈어요. 시전은 왕실과 관청에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는 역할도 맡았어요.

저는 이 배치를 상업을 지원한 정책으로만 설명하면 상인의 입장이 빠진다고 생각해요. 관청 가까이에 거래 기반이 놓였다는 이점과 국가의 감독 아래 있었다는 조건을 함께 봐야 해요.

벽란도와 수도의 연결

벽란도는 내륙에 자리한 개경을 바닷길과 연결하는 관문이었어요. 예성강 하구에 있었고 개경에서 서쪽으로 30리 남짓 떨어져 있어, 외국 사신과 상인이 내려 육로로 수도에 들어왔어요.

송과 일본 등에서 사람들이 찾아왔고, 1024년에는 대식국 상인 약 100명이 개경에 와 토산물을 바쳤다는 기록도 있어요. 대식국은 아라비아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에요.

같은 해에 행정구역 정비와 먼 지역 상인의 방문이 겹친다는 점은 흥미로워요. 안으로는 도시를 관리하고 밖으로는 교류를 이어가던 개경의 두 모습을 나란히 볼 수 있으니까요.

다만 30리라는 거리만으로 기습을 막기 위한 최적의 배치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어요. 수도와 항구가 떨어져 있었다는 사실과, 그 간격을 의도적으로 설계한 목적은 다른 문제예요.

개경 기록과 내성

숫자를 모으면 개경의 모습이 전부 복원될까요? 성곽 둘레와 행정구역 수로는 거리의 생활도, 그 도시를 바라본 사람의 시선도 다 담을 수 없어요.

송의 사신 서긍은 1123년 고려에 와 한 달 남짓 머문 뒤 『선화봉사고려도경』 40권을 남겼어요. 원래 그림도 붙어 있었지만 1126년 정강의 변을 거치며 사라져 글로 개경의 모습을 살펴야 해요.

서긍은 벽란도를 통해 들어왔고, 도시 공간뿐 아니라 목욕 습관과 그릇 같은 생활의 모습도 적었어요. 조정의 사건을 중심으로 읽게 되는 『고려사』·『고려사절요』와 함께 놓으면 다른 각도에서 개경을 생각할 수 있어요.

외부 관찰이라는 이유만으로 더 객관적이라고 볼 수는 없어요. 짧은 체류 동안 접한 장면과 외국 사신의 이해가 반영된 기록이라는 한계도 함께 읽어야 해요.

시간을 더 내려가면 1391년부터 1393년 사이에 나성 안쪽으로 둘레 약 8.5km의 내성이 새로 쌓여요. 약 23km의 나성과 더 작은 내성의 대비는 눈에 띄지만, 두 둘레의 차이를 도시 전체가 줄어든 비율로 바꿀 수는 없어요.

성곽의 축소와 도시의 축소를 구분해요

안쪽 성곽이 추가됐다는 사실만으로 바깥의 거주지와 상업 공간이 모두 사라졌다고 볼 수는 없어요. 성곽 둘레는 인구나 생활권의 크기를 그대로 대신하지 않아요.

예전에 길이와 완공 연도만 남겼던 메모에는 성벽 안에서 살아간 사람의 자리가 없었어요. 이번에는 서긍의 생활 기록과 나성 안쪽에 추가된 내성을 함께 생각하면서, 한 숫자로 도시 전체를 설명하려던 습관의 한계를 느꼈어요.

앞으로 도시의 규모를 비교할 때는 성곽의 길이인지, 행정 단위의 수인지, 사람을 동원한 규모인지부터 구분하려 해요. 개경을 크게 만든 힘을 말할 때도 그 힘에 동원된 사람과 기록에 충분히 남지 않은 생활을 함께 묻고 싶어요.

전쟁은 개경의 성곽을 이해하는 중요한 배경이지만, 도시 전체를 설명하는 유일한 열쇠는 아니에요. 성벽의 크기를 나라의 위세로 읽기 전에, 그 안팎에서 누구의 안전과 생활이 우선됐는지 질문이 남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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