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 기술사 · 최무선과 화통도감
왜선 500여 척을 불태운 전투에 쓰인 화기와, 설립 11년 만에 사라진 제조 기관을 함께 놓으면 선뜻 이해하기 어려워요. 성과가 있었다면 왜 기관은 오래 남지 못했을까요?
저는 최무선의 업적을 발명 하나보다 제조법을 알아내고 국가 생산으로 연결한 과정에서 보고 싶어요. 화통도감의 시작과 끝을 따라가되, 기관이 없어졌다는 사실과 기술이 사라졌다는 판단은 나눠서 살펴볼게요.

화통도감과 왜구 침입
왜구 침입을 긴 기간의 평균으로만 보면, 고려 말에 화약 무기가 얼마나 절실했는지 놓치기 쉬워요. 1223년부터 1392년까지 169년간 519회라는 집계 가운데 506회가 1350년 이후 42년에 집중돼 있어요.
| 구간 | 침입 횟수 | 연평균 |
|---|---|---|
| 1223~1392년 | 519회 | 약 3회 |
| 1350년 이후 42년 | 506회 | 약 12회 |
| 우왕 재위 14년 | 총횟수 별도 표기 없음 | 약 27회 |
| 1383년 | 50회 | 단일 연도 |
우왕 재위기의 연평균 약 27회는 침입이 드문 사건이 아니라 반복되는 부담이었음을 짐작하게 해요. 다만 평균을 실제로 일정한 간격마다 침입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돼요.
피해가 집중된 남부 곡창지대는 세금으로 거둔 곡식을 조운선에 실어 개경으로 보내는 지역이기도 했어요. 마을의 피해와 함께 곡식 운송이 위협받았다는 사정을 놓고 보면, 해상에서 대응할 무기를 마련하려는 필요가 더 선명해져요.
최무선과 화약 제조
화약을 알고 있다는 것과 직접 만들 수 있다는 것은 다른 문제였어요. 흑색화약의 재료인 염초·유황·목탄 가운데 최무선이 풀어야 했던 어려움은 염초 제조법이었어요.
염초는 질산칼륨을 가리키며, 당시에는 이를 흙에서 얻어내는 기술이 필요했어요. 유황이나 목탄을 확보하는 문제와 달리 제조 공정 자체를 알아야 했고, 원 조정은 관련 기술의 유출을 막았어요.
『고려사』에는 최무선이 중국 강남에서 오는 상인들에게 화약 만드는 법을 물었다는 내용이 전해져요. 그는 이원이라는 상인에게서 염초 제조법을 얻었고, 무역을 통한 사람의 왕래가 기술을 접하는 통로가 됐어요.
저도 역사 내용을 짧게 정리하면서 인물 이름 옆에 대표 업적 하나만 적어둔 적이 있어요. 최무선 옆에도 화약이라는 말만 남겨두니 기억하기는 편했지만, 무엇을 알아내고 어디까지 실현한 사람인지는 설명하기 어려웠어요.
당시에는 재료를 알고 만드는 법을 배우면 곧 무기로 쓸 수 있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어요. 그런데 염초 제조법을 얻는 일과 화기를 생산하는 일을 구분하고 나니, 제가 한 단어로 묶어놓은 과정 사이에 해결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는 걸 느꼈어요.
이원에게서 염초 제조법을 얻었다는 설명만으로 화약 제조의 모든 조건까지 한꺼번에 전수받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워요. 최무선의 성과도 완제품을 들여온 일보다는, 국내에서 생산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는 쪽에 무게를 두고 싶어요.
화통도감의 화기
제조법을 손에 넣었다고 전함에 실을 무기가 저절로 마련되는 것은 아니에요. 1377년 우왕 3년, 최무선의 건의로 설치된 화통도감은 그 기술을 국가의 무기 생산으로 연결한 관청이었어요.
최무선은 화통도감의 판사를 맡았고, 이곳에서는 화약과 화기를 제조했어요. 기관 설치에서 1380년 진포의 실전 투입까지는 3년이지만, 이 기간만으로 세부 시험 과정이나 훈련 내용을 모두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화통도감의 화기는 18종으로 전하지만, 여기에 열거한 이름은 16개예요. 자료에 따라 20여 종으로 세기도 하므로 숫자와 목록이 정확히 일치한다고 보기는 어려워요.
화전·철령전·피령전·천산오룡전
질려포·철탄자·유화·주화·촉천화·화통
여러 포와 발사체가 함께 등장한다는 점에서 화통도감의 성과를 한 종류의 무기로만 설명하기는 어려워요. 다만 이름이 다양하다는 이유만으로 구체적인 사거리 계산이나 운용 교범까지 있었다고 확정할 수는 없어요.
화통도감의 설치를 함께 놓으니, 제 메모에서 빠져 있던 부분이 조금 더 분명해졌어요. 제조법을 알아낸 사람이 있었다는 설명에 더해, 그 기술로 무기를 만들 관청이 생겼다는 사실까지 들어가야 실전으로 이어진 과정을 설명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18종이라는 숫자를 대단한 발명품의 개수로만 받아들이지 않게 됐어요. 정확한 종수의 차이는 남겨두더라도, 여러 화기를 만드는 국가 조직으로 발전했다는 변화가 더 오래 기억에 남아요.
진포 해전
고려 전함 100척과 왜선 500여 척을 나란히 놓으면 배가 많은 쪽이 유리해 보여요. 하지만 1380년 8월 금강 하구 진포에서는 화기의 사용과 상대 선단의 정박 상태를 함께 살펴야 해요.
묶여 있던 선단과 화기의 효과
나세·심덕부·최무선이 지휘한 고려군은 전함에 실은 화기로 왜구 선단을 불태웠어요. 왜구의 배들은 서로 밧줄로 묶여 정박해 있었고, 이런 밀집 상태는 불이 주변 배로 번지기 쉬운 조건이 됐어요.
진포의 성과는 화기를 배에 싣고 상대 선단을 공격했다는 데서 살펴볼 수 있어요. 저는 이를 화포 하나가 수적 열세를 무조건 뒤집었다는 이야기보다는, 새로운 무기가 상대의 약점과 맞물린 전투로 읽는 편이 더 설득력 있다고 봐요.
배를 잃은 왜구와 황산대첩
진포에서 배를 잃은 왜구는 내륙으로 이동했고, 전투는 바다에서 끝나지 않았어요. 그해 9월에는 남원 운봉 일대의 황산에서 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과 맞붙었어요.
진포와 황산을 이어서 보면 선단을 불태운 성과와 육지에 남은 위협을 함께 이해할 수 있어요. 해상에서 거둔 승리가 곧 모든 침입의 종결을 뜻하지는 않았다는 점도 놓치지 않으려 해요.
화통도감 폐지와 기술 계승
성과를 낸 기관이 없어졌다면 그 사업도 실패한 것으로 봐야 할까요? 화통도감은 1388년 조준의 건의로 폐지됐지만, 업무는 군기시로 넘어갔어요.
| 시점 | 변화 |
|---|---|
| 1377년 | 최무선의 건의로 화통도감 설치 |
| 1380년 8월 | 진포에서 화기 실전 투입 |
| 1388년 | 화통도감 폐지, 군기시로 업무 이관 |
| 1395년 | 최무선 사망 |
폐지된 해는 위화도회군으로 권력 구도가 바뀐 해이기도 해요. 다만 시점이 겹친다는 이유만으로 특정한 정치적 의도를 확정하거나, 왜구의 위협이 줄어 예산부터 삭감됐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워요.
업무가 군기시로 이관됐다는 사실은 기관의 폐지와 기술의 포기를 구분하게 해요. 통합 이후 생산 속도가 얼마나 달라졌는지는 별도의 근거가 있어야 판단할 수 있어요.
최무선이 남긴 『화약수련법』과 『화포법』 같은 기록은 기술 계승의 이야기로 이어져요. 아들 최해산이 조선에서 화약 관련 일을 이어갔고, 손자 최공손까지 같은 기술에 관여했어요.
처음 업적을 한 단어로 적었던 제 방식으로는 화통도감의 폐지도 끝이라는 표시 하나로 남겼을 것 같아요. 하지만 군기시로의 업무 이관과 최해산으로 이어진 기록을 함께 놓으면, 기관 이름이 사라진 뒤에도 무엇이 남았는지를 따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앞으로 이런 기술사를 정리할 때는 누가 만들었는지 다음에 누가 생산했고 어떻게 이어받았는지를 함께 적으려 해요. 최무선의 성과도 500여 척이라는 전과에만 머물지 않고, 제조법과 생산 조직, 다음 세대로 이어진 기록까지 연결해서 기억하고 싶어요.
화통도감이라는 기관의 시간은 11년이었어요. 그 기관이 다뤘던 기술의 시간까지 11년으로 닫을 수는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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