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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역사이야기

이규보 급제와 공백, 동명왕편·관직 이력·유배와 재상·동국이상국집과 금속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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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무신정권기 · 이규보의 관직과 문학

이규보는 국어에서는 동명왕편의 작가로, 한국사에서는 무신정권기 문인과 금속활자 기록으로 만나는 이름입니다. 저는 오래 그를 고려의 대문장가, 시를 잘 써서 이름을 남긴 사람 정도로만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급제와 첫 관직 사이에는 9년의 공백이 있습니다. 저는 이 간격과 이후의 작품을 함께 보아야 권력에 기대었던 선택과 그가 남긴 문장의 의미를 어느 한쪽으로 지우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규보의 급제 뒤 9년 공백과 재상까지의 관직 이력을 짚는 문구

이규보 급제와 공백

과거에 합격하면 곧 관리가 되었을 것 같지만, 이규보의 이력은 그렇게 이어지지 않습니다.

문장으로 출세하기 어려웠던 시대

이규보는 1168년, 의종 22년에 태어났습니다. 2년 뒤인 1170년 무신정변이 일어났으므로 그의 성장과 관직 생활은 무신이 권력을 쥔 시대 안에 놓여 있습니다.

정변 당시 많은 문신이 살해되었고, 이후 권력의 중심은 무신에게 넘어갔습니다. 문장과 시험 성적만으로 앞길을 기대하기 어려운 조건이었습니다.

아버지는 호부낭중을 지낸 중급 관료였으며, 집안은 고위 문벌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이규보는 어려서부터 글재주로 이름이 났다고 전하며, 스스로 백운거사라는 호와 거문고·시·술을 좋아한다는 삼혹호라는 별칭을 붙였습니다.

합격과 임용 사이의 9년

1189년 국자감시에 수석으로 합격하고, 이듬해 1190년 5월 예부시에 급제했습니다. 당시 나이는 스물셋이었으며, 예부시 성적은 합격자 가운데 아래 등급인 동진사였습니다.

급제는 관직 후보가 되는 일이었고 실제 임용은 별도로 이루어졌습니다. 이규보는 첫 관직을 얻는 1199년까지 자리를 받지 못했습니다.

1191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형편은 더 어려워졌으며, 천마산에 들어가 지내며 시를 썼습니다. 1197년 최충헌 정권에 관직을 청하는 글을 올렸지만 곧바로 임용되지는 않았습니다.

저도 인물 공부를 하면서 이름 옆에 대표작과 마지막 관직만 적어둔 적이 있습니다. 한눈에 외우기 편해서 그렇게 정리했지만, 그 사이의 기다림은 메모에서 사라졌습니다.

이규보의 급제와 첫 임용을 나란히 놓으니 제가 생략했던 시간이 눈에 들어옵니다. 대문장가라는 이름만으로는 합격하고도 자리를 받지 못한 청년의 처지를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이규보 동명왕편

관직의 공백이 곧 집필의 공백은 아니었습니다.

대표작 「동명왕편」은 1193년, 스물여섯의 이규보가 관직 없이 지내던 시기에 쓴 작품입니다. 고구려 시조 동명왕, 곧 주몽의 일대기를 오언시 280여 구로 풀어낸 장편 서사시입니다.

서문에는 동명왕 이야기를 처음에는 귀신 이야기로 여겼으나, 『구삼국사』를 읽고 거듭 음미하면서 성스러운 이야기로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집필 동기가 나옵니다.

이규보는 이를 시로 남겨 우리나라가 본래 성인의 나라임을 알리려 했습니다. 여기에는 옛이야기를 옮기는 일뿐 아니라, 그 이야기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작가의 판단도 담겨 있습니다.

사라진 역사서의 흔적

『구삼국사』는 현재 전하지 않으며, 김부식의 『삼국사기』보다 앞선 역사서로 추정됩니다. 「동명왕편」의 주석에 인용된 내용은 그 사라진 책의 일부를 엿볼 수 있게 합니다.

저는 대표작을 마지막 관직과 나란히 적으면 작품도 출세 이후의 성취처럼 받아들이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동명왕편」의 집필 시점을 보니, 관직을 얻기 전부터 문학적 작업은 이미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그 뒤로는 공백이라는 말을 조금 좁혀 읽게 됩니다. 관직은 없었지만, 사료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시로 남기는 일까지 멈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규보 관직 이력

글을 잘 쓴다는 사실과 그 글을 누가 받아들이는가는 서로 다른 문제였습니다.

1199년 최충헌이 연회를 열어 문인들에게 시를 짓게 했고, 이규보의 시가 그의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해 이규보는 전주목 사록 겸 장서기라는 첫 관직을 받았습니다.

지방 행정의 실무 기록을 맡는 자리였지만 이듬해 동료의 모함으로 파면되었습니다. 1202년에는 경주 일대 민란 진압군에 자원하여 병마녹사 겸 수제원으로 문서를 맡았으나, 돌아온 뒤 포상은 받지 못했습니다.

1207년에는 최충헌의 정자 모정을 위한 기문이 뽑힌 뒤 직한림에 임명되었습니다. 왕의 문서를 짓는 한림원의 자리였으며, 이때 이규보는 마흔 살이었습니다.

연도 나이 관직·사건
1189 22 국자감시 수석
1190 23 예부시 급제
1190~1199 23~32 관직 없는 기간
1199 32 최충헌 시회 뒤 전주목 사록 겸 장서기
1200 33 파면
1202 35 경주 민란 진압 종군
1207 40 최충헌 모정기 선정 뒤 직한림
1215 48 우정언·지제고
1225 58 국자시 주관
1228 61 판위위사
1230 63 위도 유배 8개월
1232 65 최우의 배려로 판비서성사 복직
1237 70 문하시랑평장사로 치사
1241 74 사망

이력에서 첫 임용과 직한림 진출, 훗날의 복직에는 최씨 집안이 등장합니다. 다만 이 사실만으로 모든 승진의 이유나 문학적 성취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예전의 메모처럼 끝자리만 보면 이 과정이 재능에 따른 순조로운 상승으로 보일 수 있다고 느낍니다. 임용과 파면, 재진출의 계기를 따로 살피면 문장 실력과 권력자의 인정이 얽혀 있었다는 점이 더 구체적으로 다가옵니다.

이규보 유배와 재상

재상으로 은퇴했다는 마지막 줄 앞에도 유배라는 굴곡이 남아 있습니다.

위도 유배와 복직

1230년 예순셋의 이규보는 팔관회 행사와 관련한 탄핵으로 전라도 위도에 유배되었습니다. 관리들 사이의 다툼에 휘말린 성격이 강했다는 해석도 있으나, 이를 그의 책임이 전혀 없었다는 뜻으로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유배는 8개월 만에 끝났고, 1232년 최우의 배려로 판비서성사에 복직했습니다. 그해는 최우가 강화도로 수도를 옮긴 해이기도 합니다.

위도에서 쓴 시에는 유배지의 풍경과 자신의 처지가 담겨 있습니다. 관직의 변화와 별개로 집필이 이어졌다는 점은 관직표만으로 놓치기 쉬운 부분입니다.

국가 문서와 은퇴 이후의 평가

최우 정권에서 이규보는 국가의 중요한 문서를 작성했습니다. 「대장각판군신기고문」은 몽골 침입으로 초조대장경이 불탄 뒤 대장경을 다시 새기며 왕과 신하들이 부처에게 올린 기원문입니다.

1237년 무렵 지은 이 문서는 대장경을 다시 만드는 이유를 국가의 이름으로 밝힙니다. 같은 해 이규보는 문하시랑평장사라는 재상 직함으로 치사, 곧 관직에서 은퇴했습니다.

술을 의인화한 가전체 「국선생전」과 시를 논한 「백운소설」도 그의 이름으로 전합니다. 가전체는 사물을 사람처럼 꾸며 그 일생을 전기 형식으로 쓰는 문학 양식입니다.

최충헌과 최우를 칭송한 글 때문에 권력에 봉사한 문인이라는 비판을 받는 한편, 어려운 시대에 문학과 국가 문서의 맥을 이어갔다는 평가도 받습니다.

저는 이 두 평가 가운데 하나를 골라 다른 하나를 지우기보다, 어떤 글이 누구를 위해 쓰였는지 구분하고 싶습니다. 오래 기다렸다는 사정은 선택의 배경을 이해하게 하지만, 권력자를 칭송한 글에 대한 판단까지 대신해주지는 않습니다.

이규보 동국이상국집과 금속활자

문집은 작가 자신의 글뿐 아니라, 사라진 다른 책의 흔적도 보관할 수 있습니다.

이규보가 세상을 떠난 1241년 그의 글을 모은 『동국이상국집』이 간행되었습니다. 아들 이함이 엮었으며 최우의 후원이 있었습니다.

전집 41권과 후집 12권을 합쳐 모두 53권입니다. 「동명왕편」과 「국선생전」, 「백운거사전」 등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문집에는 『상정고금예문』을 금속활자로 28부 찍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이규보가 최우를 대신해 쓴 발문, 곧 책의 간행과 관련한 글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문헌 기록과 현존 실물의 차이

『상정고금예문』의 금속활자본 실물은 전하지 않습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인 『직지』와, 그보다 100년 이상 앞선 인쇄를 전하는 문헌 기록은 구분해서 읽어야 합니다.

「동명왕편」의 주석은 사라진 『구삼국사』의 일부를, 문집의 발문은 전하지 않는 금속활자본의 존재를 전합니다. 작품의 문학적 가치와 별개로 이러한 기록의 역할도 남았습니다.

이규보를 정리하며 저는 대표작과 마지막 관직을 적던 방식에, 작품이 쓰인 시점과 남긴 기록을 함께 놓아보고 싶어졌습니다. 권력과의 관계는 그대로 살피되, 그 문장 덕분에 무엇을 알 수 있게 되었는지도 빠뜨리지 않으려 합니다.

재상이라는 마지막 자리와 53권이라는 결과 사이에는 서로 다른 목적의 글들이 있습니다. 이규보를 어떻게 평가할지는 그 글들을 하나씩 구분해서 읽는 데서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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