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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역사이야기

과전법과 공양왕: 토지 문제, 조준 상소, 기사양전, 토지문서 소각, 공포와 한계

by 역사좋아 2026.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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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8~1391년 · 고려사 식화지의 토지문서 소각 기록 참조

과전법을 조선 건국과 함께 기억하면, 정작 법이 만들어질 때 왕좌에 있던 공양왕을 놓치기 쉬워요. 과전법은 고려가 아직 존재하던 1391년 5월에 공포됐어요.

저는 이 개혁을 낡은 제도를 바로잡은 성과만으로 평가하기는 어렵다고 봐요. 농민의 부담을 줄이는 설계와 새 관료 집단의 경제 기반을 마련하는 선택이 함께 들어 있었기 때문이에요.

공포에 앞서 개경에서는 옛 토지문서가 불탔고, 공양왕은 그 일을 탄식했어요. 누구의 권리를 없애고 누구에게 새 권리를 주었는지 따라가면, 불길의 의미도 달라져요.

과전법, 불탄 토지문서와 누구의 개혁이었는지를 묻는 문구

과전법 이전의 토지 문제

한 땅에 세금을 받을 사람이 여럿이라면, 농민은 누구에게 얼마나 내야 했을까요? 고려 후기 토지 문제는 이런 권리의 중복에서 출발해요.

고려의 관리는 국가로부터 수조권, 곧 토지에서 세금을 걷을 권리를 받았어요. 땅 자체의 소유권과는 구별되며, 관직에서 물러나면 돌려주는 것이 원칙이었어요.

원 간섭기를 거치며 권세가들은 수조권을 세습하거나 남의 땅에 권리를 겹쳐 주장했고, 빼앗은 땅을 대농장으로 묶었어요. 농민이 같은 땅을 두고 여러 사람에게 세를 내는 일이 생겼고, 한 땅의 권리자가 대여섯을 넘는 경우도 있었어요.

국가 재정도 어려워져 관리에게 줄 녹봉과 군인에게 지급할 토지가 부족해졌어요. 새로 관직에 오른 신진사대부 역시 받을 몫이 없는 상황에 놓였어요.

저도 역사 용어를 공부하면서 과전법 옆에 고려 말 토지개혁이라는 짧은 설명만 적어둔 적이 있어요. 시험에서 제도 이름을 구분하려다 보니, 누가 세금을 걷고 누가 부담하는지는 따로 묻지 않았어요.

그때는 토지개혁이라는 말만 보고 농민에게 땅을 나눠준 제도로 받아들였어요. 하지만 수조권을 다시 배분했다는 내용을 정리하면서, 땅을 받는 일과 세금을 받을 권리를 얻는 일이 다르다는 데서 이해가 막혔어요.

이 구분을 놓치면 개혁의 수혜자도 잘못 읽게 돼요. 신진사대부는 폐단을 고치려는 집단인 동시에, 새 배분에서 자신의 몫을 확보하려는 관료 집단이기도 했어요.

과전법과 조준 상소

토지개혁에 찬성한다고 해서 모두 같은 제도를 원했던 것은 아니에요. 1388년 조준의 상소 이후에도 새 권리를 누구에게 줄 것인지를 놓고 입장이 갈렸어요.

회군 뒤 이어진 개혁안

1388년 5월 위화도회군으로 이성계 세력이 군사권을 쥐었고, 6월에는 우왕이 물러나고 창왕이 즉위했어요. 이어 7월 조준이 토지제도를 근본부터 바꾸자는 상소를 올렸어요.

조준은 사사로이 차지한 토지를 국가에 귀속시키고, 관리에게 직급에 따라 수조권을 새로 나누며 세습을 막자고 주장했어요. 이후에도 여러 차례 상소를 올리며 개혁을 추진했어요.

백성에게 줄 몫과 관료에게 줄 몫

정도전은 모든 토지를 국가가 거두어 백성에게 나누는 계민수전을 주장했지만, 이 안은 채택되지 않았어요. 조준의 안은 기존 사전을 혁파한 뒤 관리에게 수조권을 재분배하는 방향이었어요.

입장 인물 방향
급진 개혁 정도전 토지를 거두어 백성에게 분배
온건 개혁 조준 사전 혁파 뒤 관료 수조권 재분배
기존 제도 유지 이색·이림·우현보 등 옛 제도를 유지하며 폐단 시정

조준의 설계는 권문세족의 권리를 줄이면서 신진 관료의 지지를 확보하는 방향이었어요. 저는 이를 단순히 가장 현실적인 안이라고 부르기보다, 개혁을 추진하는 집단의 이해가 반영된 선택으로 보는 편이 정확하다고 생각해요.

세 주장을 나란히 정리하고 나니, 제가 적어둔 토지개혁이라는 한 단어가 서로 다른 목표를 가리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농민에게 토지를 나누는 안과 관료에게 수조권을 주는 안을 구별하면서, 과전법을 무조건 농민 중심 개혁으로 읽던 판단을 고쳤어요.

과전법의 기사양전과 공양왕

새 배분표를 만들려면 땅부터 알아야 했지만, 새 왕을 세운다고 개혁에 대한 동의까지 얻을 수는 없었어요. 1389년에는 토지 측량과 왕위 교체가 함께 진행됐어요.

기사양전과 새 토지대장

1389년에는 전국 토지를 다시 측량하는 기사양전이 시행됐어요. 기사년에 실시한 양전, 곧 토지 조사·측량이라는 뜻이에요.

토지를 계산하는 결은 일정한 넓이만을 뜻하지 않았어요. 같은 수확량을 기준으로 잡았기 때문에 비옥한 땅의 1결은 좁고, 척박한 땅의 1결은 넓을 수 있었어요.

양전에서는 넓이뿐 아니라 토지의 등급도 살펴야 했고, 결과는 새 토지대장으로 정리됐어요. 저는 이 장부를 단순한 행정 서류보다 누가 얼마를 거둘지 정하는 배분의 기준으로 봐요.

공양왕 옹립과 개혁의 긴장

1389년 11월 개혁파는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세웠어요. 우왕과 창왕이 왕씨가 아니라 신돈의 자손이라는 주장을 명분으로 내세운 폐가입진이었어요.

공양왕은 신종의 7대손인 왕실 방계로, 즉위 당시 마흔다섯이었어요. 이성계 세력이 옹립했지만 이색 등과 가까웠고, 토지개혁에는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어요.

공양왕 때 공포된 법이라는 말이 곧 공양왕이 적극적으로 이끈 개혁이라는 뜻은 아니에요. 법에 붙은 왕의 이름과 실제 추진 세력의 뜻을 구별해야 당시의 긴장이 보여요.

과전법 이전의 토지문서 소각

옛 장부를 태우는 일은 종이를 없애는 데서 끝나지 않았어요. 그 장부를 근거로 주장하던 토지 권리까지 끊으려는 조치였어요.

1390년 9월 개경 시가에서 공전과 사전의 옛 토지문서인 공사전적이 불태워졌어요. 고려사 식화지는 불이 며칠 동안 꺼지지 않았다고 전해요.

같은 기록에는 공양왕이 탄식하며 눈물을 흘렸다는 내용도 있어요. 조상 때부터 내려온 사전의 법이 자신의 대에 갑자기 혁파되는 일을 애석해했다는 취지예요.

시기 사건
1388년 5~7월 위화도회군 → 우왕 폐위·창왕 즉위 → 조준 상소
1389년 기사양전, 11월 공양왕 즉위
1390년 9월 공사전적 소각
1391년 5월 과전법 공포

새 토지대장이 만들어진 뒤에도 옛 장부가 남아 있으면, 기존 권리자가 이를 근거로 권리를 되찾으려 할 수 있었어요. 소각은 그런 주장의 근거를 없애는 조치로 읽을 수 있어요.

수조권의 이동을 이해하고 나니, 며칠간 이어진 불길도 단순히 과감한 개혁의 장면으로만 보이지 않았어요. 낡은 권리의 근거를 없앤 자리에 누구의 권리가 새로 적힐지를 함께 보게 됐어요.

공양왕의 눈물만으로 개혁의 옳고 그름을 판정할 수는 없어요. 다만 왕의 이름 아래 추진된 제도가 왕의 뜻과도 충돌했다는 점은, 이 과정을 매끄러운 합의로 설명하기 어렵게 해요.

과전법 공포와 한계

농민 부담을 줄이는 제도와 농민에게 땅을 나눠주는 제도는 같지 않아요. 1391년 5월 공포된 과전법은 이 차이를 분명하게 드러내요.

18과의 지급 기준과 수조율

과전법은 관리를 18등급으로 나누어 수조권을 지급했어요. 가장 높은 1과는 150결, 가장 낮은 18과는 10결로 지급량에 차이를 두었어요.

등급 결수 등급 결수 등급 결수
1과 150결 7과 89결 13과 43결
2과 130결 8과 81결 14과 35결
3과 125결 9과 73결 15과 25결
4과 115결 10과 65결 16과 20결
5과 106결 11과 57결 17과 15결
6과 97결 12과 50결 18과 10결

관리에게 주는 과전은 경기 지역으로 제한했어요. 국가가 관리하기 쉬운 지역에 묶어두고 지방의 사적 세력 기반을 억제하려는 설계였으며, 지방에 머무는 하급 관리 출신에게는 별도의 군전 규정을 두었어요.

수조율은 1결당 30두로, 수확의 10분의 1 수준으로 정했어요. 과도한 징수를 제한하려는 기준이지만, 정해진 수조율만으로 모든 농민의 실제 부담이 곧바로 줄었다고 단정해서는 안 돼요.

세습 예외와 관료 중심의 한계

과전은 세습 금지가 원칙이었지만, 사망한 관리의 아내에게 주는 수신전과 어린 자식에게 주는 휼양전이라는 예외가 있었어요. 이런 통로는 사실상의 세습으로 이어졌어요.

관료는 늘고 경기 토지는 한정돼 있어, 시간이 지나며 지급할 토지가 부족해졌어요. 이후 조선 세조 때에는 현직 관리에게만 지급하는 직전법으로 바뀌었어요.

성과와 수혜자는 따로 살펴야 해요

중복된 수조권과 과도한 징수를 바로잡으려는 변화는 있었어요. 그러나 정도전이 주장한 백성에 대한 토지 분배가 실현된 것은 아니었어요.

1392년 7월 조선이 건국될 때 신진 관료들은 이미 과전법으로 수조권을 배분받은 상태였어요. 왕조가 바뀌기 전에 새 지배 집단의 경제 기반부터 마련됐다는 점에서, 과전법은 정치 변화와도 맞물려 있었어요.

이제는 농민에게 땅을 주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과전법의 변화를 모두 지우고 싶지는 않아요. 여러 사람에게 세를 내는 폐단을 바로잡고 징수량에 기준을 두려는 설계와, 관료에게 권리를 재배분한 한계를 함께 평가해야 한다고 느껴요.

앞으로 토지제도를 정리할 때는 제도 이름보다 누구에게 어떤 권리를 주었는지 먼저 확인하려고 해요. 개경에서 사라진 장부만 바라보지 않고, 새 장부의 수혜자가 누구였는지도 묻는 쪽으로 읽는 기준이 달라졌어요.

개경의 불길은 며칠 뒤 꺼졌지만, 권리의 재배분은 다음 왕조로 이어졌어요. 새 장부가 생겼다는 사실과 그 장부가 백성을 얼마나 위한 것이었는지는 서로 다른 질문으로 남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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