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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역사이야기

광종 노비안검법·과거제, 왕권 강화와 숙청 — 40여 명의 평가와 기록 읽기

by 역사좋아 2026. 9.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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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고려사절요·최승로 상서문 참조

광종은 노비안검법을 실시하고 호족을 숙청한 왕으로 기억하기 쉬워요. 그런데 몇 명이 풀려났고 몇 명이 죽었는지 물으면, 익숙했던 설명에 빈칸이 생겨요.

저는 그 빈칸을 그럴듯한 숫자로 채우기보다, 남아 있는 숫자가 무엇을 센 것인지 구분하는 편이 낫다고 봐요. 949년부터 975년까지 이어진 광종의 통치를 해방 인원과 숙청 인원만으로 비교할 수 있을까요?

광종의 해방과 숙청, 몇 명인지 묻고 기록의 빈칸을 짚는 문구

광종 노비안검법

노비를 풀어준 법이라면, 풀려난 사람 수도 남아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는 노비안검법으로 양인이 된 사람의 총계가 나오지 않아요.

956년에 시행한 노비안검법은 원래 양인이었다가 전란 중 포로가 되거나 빚 때문에 노비가 된 사람을 가려내 신분을 되돌리는 조치였어요. 안검은 조사하고 판별한다는 뜻으로, 모든 노비를 일괄적으로 해방했다는 설명과는 구분해야 해요.

저도 광종의 업적을 정리하면서 종이에 풀려난 사람과 숙청된 사람을 나눠 적어본 적이 있어요. 양쪽에 인원을 채우면 개혁의 성과와 희생을 좀 더 선명하게 비교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해방 인원 칸부터 채울 수 없었어요. 숫자가 없는 자리에 영향이 작았다고 적는 것도, 반대로 아주 많았다고 적는 것도 근거를 넘어선다는 데서 멈췄어요.

법의 파장은 반응을 통해 살펴볼 수 있어요. 대목왕후가 폐단을 들어 간언했다는 기록, 옛 주인을 업신여기는 사람이 생겼다는 비판, 훗날 신분을 되돌리는 법이 등장했다는 사실이 남아 있어요.

다만 이런 반응은 신분 변화와 갈등의 흔적이지, 해방 인원을 역산할 계산식은 아니에요. 총계가 없는 이유 역시 개별 심사 방식이나 행정 여건 때문이라고 확정하기보다, 기록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으로 남겨두는 편이 정확해요.

광종 과거제

일곱 명을 뽑은 시험은 작고, 인원을 모르는 신분 개혁은 큰 사건이라고 나눌 수 있을까요? 과거제는 숫자의 크기와 제도의 의미가 꼭 비례하지 않는 사례예요.

후주에서 귀화한 쌍기의 건의로 958년 5월 첫 과거가 열렸고, 쌍기가 시험을 주관했어요. 이때 선발된 인원은 과목별로 남아 있어요.

과목 인원 내용
갑과·제술 2명 최섬 등
명경 3명 유교 경전
복업 2명 점복·천문 계열
합계 7명 958년 첫 시행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선발 인원뿐 아니라 시험을 통한 관료 선발이라는 방식이에요. 공신이나 호족의 영향력과 별개로 왕이 인재를 등용할 통로를 마련했다는 의미가 있어요.

제 메모에서도 7명은 처음으로 또렷하게 채울 수 있는 숫자였어요. 다만 이 수치는 첫 시험의 선발 규모를 알려줄 뿐, 광종의 개혁 전체가 얼마나 성공했는지까지 대신 말해주지는 않았어요.

노비안검법에는 해방 총계가 없고 과거제에는 첫 선발 인원이 있다고 해서, 후자만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하나는 신분 관계의 변화로, 다른 하나는 선발 방식의 변화로 살펴야 비교가 어긋나지 않아요.

광종 왕권 강화와 숙청

왕의 권한이 커졌다는 설명만으로 그 과정까지 좋았다고 평가할 수는 없어요. 960년에는 왕의 위상을 높이는 조치와 고발·처벌 사건이 함께 나타나요.

서열과 위상을 드러낸 조치

960년에는 백관의 공복을 자·단·비·녹의 네 색으로 구분하고, 독자 연호인 준풍을 사용했어요. 개경을 황도라고 부른 것도 이 시기의 조치예요.

옷 색으로 관료의 서열을 드러내고 연호와 수도 명칭으로 통치자의 위상을 표현한 것이에요. 과거제가 선발 통로를 마련했다면, 이런 조치는 관료 질서와 왕의 격을 눈에 보이게 했다고 볼 수 있어요.

고발과 처벌에 남은 이름

같은 해 평농서사 권신이 대상 준홍과 좌승 왕동의 모역을 고발했고, 두 사람은 처벌받았어요. 낮은 지위의 관리가 고위 관료를 고발한 이 사건 이후 참소가 이어졌다는 흐름도 살펴야 해요.

964년에는 태조의 공신 박수경의 아들 승위·승경·승례가 참소로 투옥됐어요. 박수경은 그해 죽었으며, 고려사는 그가 분하여 죽었다고 적었어요.

왕족 중에는 효은태자 왕원, 흥화궁군, 경춘원군의 피해 기록도 남아 있어요. 다만 투옥, 처벌, 죽음의 경위를 구분하지 않고 이름을 모두 처형 인원으로 더해서는 안 돼요.

제도적 성과
시험을 통한 관료 선발
공복으로 드러낸 관료 서열
왕의 위상 강화
통치 과정의 비용
참소와 처벌의 확대
공신과 왕족의 피해
사례만으로는 알 수 없는 총규모

저는 제도 정비의 성과를 인정하는 것과 숙청의 피해를 따지는 일을 함께 해야 한다고 봐요. 같은 해에 일어났다는 사실은 연결해 볼 이유가 되지만, 그것만으로 모든 조치가 하나의 계획이었다고 확정할 수는 없어요.

광종 40여 명과 평가

40여 명이라는 숫자를 찾으면 숙청 규모에 가까워진 듯하지만, 이것은 죽은 사람 수가 아니에요. 975년 경종 즉위 당시 살아남은 옛 신하와 장수를 가리켜요.

생존자 수로 사망자를 계산할 수 없는 이유

982년 최승로가 성종에게 올린 상서문에는 태조 이래의 옛 신하와 장수 가운데 남은 사람이 40여 명뿐이었다는 진술이 있어요. 처음 집단의 총원이 없으므로 생존자 수를 빼서 사망자를 계산할 수 없어요.

저도 이 대목에서는 비어 있던 숙청 인원 칸에 드디어 숫자를 넣을 수 있겠다고 여겼어요. 하지만 문장이 세고 있는 대상은 희생자가 아니라 생존자여서, 숫자 옆에 무엇을 센 것인지부터 다시 적었어요.

그렇게 적고 나니 7명과 40여 명을 나란히 놓아도 성과와 희생의 비교표는 되지 않았어요. 정확해 보이는 숫자를 모으는 일보다 서로 다른 집단과 시점을 섞지 않는 일이 먼저라는 걸 느꼈어요.

40여 명이 말하지 않는 것

생존자 수는 숙청 사망자 수가 아니에요. 원래 인원과 사망 경위가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사라진 사람을 모두 광종에게 죽임당한 사람으로 계산할 수 없어요.

최승로의 비판과 제도의 존속

최승로의 상서문은 광종의 통치를 비판하며 성종에게 정책 방향을 제시하는 글이에요. 초반 8년을 긍정적으로 보고, 960년부터 975년까지의 16년을 강하게 비판하는 구분도 그 목적과 함께 읽어야 해요.

그렇다고 비판적인 기록이라는 이유만으로 40여 명이라는 진술을 버릴 필요는 없어요. 옛 신하와 장수의 감소를 최승로가 얼마나 심각하게 제시했는지 보여주는 자료로는 의미가 있어요.

비판받은 시기에도 과거제가 자리 잡았고, 963년에는 구휼 기금인 제위보가 설치됐으며 귀법사도 창건됐어요. 저는 이런 내용을 함께 놓아야 광종을 초반에는 좋고 후반에는 나빴던 왕이라는 한 줄 평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봐요.

광종 기록 읽기

광종의 개혁을 더 알고 싶은데 인원 총계가 없다면, 무엇을 비교하면 좋을까요? 제도가 뒤에 어떻게 유지되거나 바뀌었는지를 보면 다른 질문을 이어갈 수 있어요.

956년에서 31년이 지난 987년에는 노비환천법이 시행됐어요. 옛 주인을 업신여기거나 주인의 친족과 다툰 사람을 다시 천인으로 돌리는 내용으로, 노비안검법으로 이루어진 신분 회복을 되돌릴 수 있는 조치였어요.

이를 해방된 사람이 모두 다시 노비가 됐다는 뜻으로 확대해서는 안 돼요. 31년은 두 법의 시행 사이 간격이지, 되돌아간 사람의 수나 법의 효과가 완전히 사라진 시점을 뜻하지 않아요.

반면 과거제는 조선 말까지 이어졌어요. 왕에게 관료 선발 통로가 된 제도와 기존 주인의 이해관계를 건드린 조치가 서로 다른 경로를 밟았다는 관점에서 비교해 볼 만해요.

처음 만들었던 두 칸짜리 메모로는 광종을 평가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이제는 더 분명해졌어요. 다음에 역사 속 숫자를 정리할 때는 인원 옆에 대상과 시점을 먼저 적고, 제도의 지속 여부는 별도로 살펴보려고 해요.

이런 읽기는 광종이 성군인지 폭군인지 빠르게 판정하고 싶은 독자보다, 교과서의 두 줄 사이를 이해하고 싶은 독자에게 어울려요. 특히 숙청 인원을 찾거나 40여 명이라는 수치를 인용하려는 경우에는 숫자의 대상을 구분하는 과정이 필요해요.

몇 명을 풀어주고 몇 명을 죽였는지는 끝내 총계로 답하기 어려워요. 그 빈칸을 남겨둔 채로도, 누구의 신분이 바뀌었고 어떤 선발 방식이 남았으며 누가 통치를 비판했는지는 물을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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